......지난 세기 특히 1945년 이후 한국인 연구자 공동체는 일본 근대 역사학이 만든 한국사에 대한 역사상과 그 연구방법을 비판하고 한국사 자체를 되살릴 책무가 있었다. 이는 식민사학을 타파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이 만든 역사상과 그 연구방법을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것은 식민사학을 청산하였다고 생각하는 현재 한국사의 중심에 일본의 실증사학이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 물신화되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있던 일본과 한국은 표면적으로는 ‘敵’이지만, 실증사학이란 방법에서는 실제적으로 내연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에서 ‘친밀한/내연의 적(intimate enermy)'의 관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바로 미청산 식민사학의 문제와 연관되는 동시에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문제와도 연관되기도 한다.
일본과 한국의 실증사학이 내연관계를 갖게된 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일본 연구자들과 한국 연구자 공동체의 1세대 연구자들이 어떤 관계에 있었나 보기로 한다. 津田左右吉이 1917년 9월 강사가 되었고 1918년 10월 교수가 되어 1940년 1월 사직한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던 이병도(1919년 졸업)와 손진태(1927년 졸업)를 주목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한국 실증사학의 고향이 일본 실증사학이었고, 그들은 일본 실증사학의 내연의 적이기보다 오히려 식민지 출신 적자(어쩌면 서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병도와 손진태는 신묘년조를 근거로 만들어진 왜의 한국남부 침공과 통치라는 일본 실증사학의 역사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병도는 신라본기 내물왕(356-402) 이전의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고 하였다.13) 1948년 손진태는 신라의 국가적 흥기가 13대 미추왕대(261-284)부터였다고 하였다.14) 그들 모두 ꡔ삼국사기ꡕ 초기기록을 불신하고 ꡔ삼국지ꡕ 한조에 의한 삼한론을 따르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것이 문제다. 두계(이병도)사학은 한국 실증사학의 대명사와 같이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15) 이병도와 손진태는 일본에서 실증사학의 연구관행을 전수 받았고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사 연구와 교육을 맡았다. 이병도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국사 교사를 훈련시켰고,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사학과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는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5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1960년에는 문교부 장관․학술원 회장이 되었다. 손진태는 1945년에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949년에는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이후 그들은 국사 교과서 편찬작업을 주도하였고 교사를 양성하였으며 많은 연구자들을 배출하여 한국의 역사 연구와 교육을 장악하였다. 더욱이 그들이 문교부 장관과 차관을 지내며 연구와 교육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막았고, 그들이 일본에서 전수받았던 실증사학에 의한 역사학을 한국 학계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1945년 이후 한국사의 교육과 연구를 개척한 이병도와 손진태의 학문적인 공은 무시할 수 없다. 사료비판을 중시하는 일본 실증사학의 연구방법을 배워온 그들은 한국사연구의 수준을 높이고 현재 한국 실증사학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특히 그들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에 의하여 불모지가 되었던 한국사를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매김 한 업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한국고대사 연구와 관련하여 1세대 연구자들에게 문제는 있다. 그들 누구도 ꡔ삼국사기ꡕ 초기기록과 ꡔ삼국지ꡕ 한조에 대한 사료비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ꡔ삼국사기ꡕ 초기기록을 불신하고 ꡔ삼국지ꡕ 한조를 중심으로 삼한론을 발전시켰으며 백제는 고이왕, 신라는 내물왕 때 고대국가가 되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것이 지난 수십 년간 국정 교과서인 ꡔ국사ꡕ에 의한 국민교육의 내용이 되었고, 국민적 상식이 되었다. 지금도 한국과 일본에서 삼한론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고이왕․내물왕에서 시작되었다는 고대국가는 중앙집권국가라고 명칭만 바뀌었다. 필자도 삼한의 존재를 인정한다. 다만 ꡔ삼국사기ꡕ에 나오는 백제와 신라 왕국의 성장을 무시한 삼한론을 문제삼는 것이다. ꡔ삼국사기ꡕ 초기기록에 한하여 보면 1세대 연구자들에게 있어 일본 실증사학은 타파의 대상이 아니라 순응․추종의 대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