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밤마다 바나나를 깐다
아침까지 두면 맛이 다 간다 후딱 처묵어라
리어카에서 몸을 팔다 온 바나나
물오르다 못해 짓물렀다
깐다
밥은 바나나 밤은 바나나 밥 대신 먹는 바나나는 외로워
한 입씩 잘린다
밤은 바나나 밥은 바나나 밥 대신 먹은 바나나는 예뻐
익을 대로 익은 미소가 고인다
골목 입구 허름한 불빛 아래서
어머니는 밤마다 호객 행위를 한다
늦게 귀가하는 아비나 어미에게
유통기간이 짧은 노래를 판다
바나나는 밤마다 검은 비닐봉지에 싸여
아이들에게로 간다
허기지게 간다
산동네에선 꿈이 자꾸 미끄러진다
임효림, 속
햇볕에 그을린 저 바윗돌도
깝질을 벗기면 순결한 속살이 있다
그 속살에도 천둥소리 들린다
천둥소리에는 도랑물도 흐른다
박이화, 열정과 냉정 사이
물과 얼음사이 그 무엇 있다
쾅쾅 얼어붙은 저수지가
한순간 죽음의 장소로 변하는 것도
물과 얼음 사이
그 무엇 때문이다
사랑이 증오로 바뀌듯
열정과 냉정 사이 저 위험천만한 관계
그러므로 얼어붙은 저수지를 함부로 믿지마라
겨울 저수지는 건너는 곳이 아니다
그저 멀리서 산그늘처럼 바라만 보아야 한다
물 반 얼음 반
얼었다 녹았다 물도 되고 얼음도 되는
저 위태위태한 살얼음처럼
내게도 미웠다 그리웠다
온종일 종잡을 수 없는 생각과 생각 사이
살얼음 같은 마음 있다
그러니 나를 믿지마라
김혜수, 모든 첫번째가 나를
모든 첫번째가 나를 끌고 다니네
아침에 버스에서 들은 첫번째 노래가
하루를 끌고 다니네
나는 첫 노래의 마술에서 풀려나지 못하네
태엽 감긴 자동인형처럼 첫 노래를 흥얼거리며
밥을 먹다가 거리를 걷다가
흥정을 하다가 거스름돈을 받다가
아침에 들은 첫번째 노래를 흥얼거리네
모든 첫번째 기척들이 나를 끌고 다니네
첫 떨림과 첫 경험과 첫사랑과 첫 눈물이
예인선처럼 나를 끌고
모든 설레임과 망설임과 회한을 지나
모든 두번째와 모든 세번째를 지나
모든 마지막 앞에 나를 짐처럼 부려놓으리
나는, 모든, 첫번째의, 인질
잠을 자면서도 나는
아침에 들은 첫 노래를 흥얼거리네
나는, 모든, 첫 기척의, 볼모
이선이, 기러기
깃털 다 빠져나가 홀쭉해진
베갯머리
잇단음표로 떠도는 끼룩거림이여
하늘은 구만리
그리움은 목이 길고 다리가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