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 햇빛의 비단으로
늘 닦여 있는 햇빛
어디서든지 외로운 이웃들이
베틀에 앉아
비단실을 꾸러미로 짜고
몇 필이 되면
가슴속 깊이 개어 넣었다가
괴로운 밤, 어둔 방을 밝힐
그런 재물로 삼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으로 추운 사람들을 찾아서
짜두었던 빛의 천을 한 자락씩 잘라 나눠주면
외로운 이웃들은 서로서로 마주보며
드문드문 빛나는 별이 되리라
김혜수, 공갈빵
크고 딱딱한 공갈빵
한입 베어물면
달착지근한 설탕물 흘리며
빵 속 가득한 허공이 큰 입을 벌린다
구파발행 마지막 지하철
자정 근처의 텅 빈 지하철 안이
공갈빵과 같다
공갈빵은 먹기 직전까지만 빵이다
마지막 1분이 되기 전의 영원한 59초처럼
한입 덥석 베어무는 순간
허공이 되어 사라져버린
다만 길고 긴 직전뿐인
와글와글하던 한때
춤만 있고 춤추는 사람은 없는
하모니카 뭉개진 소리만 있고 연주가는 없는
주정만 있고 술꾼은 없는
텅 빈 지하철 속의
쩌렁쩌렁
빈 음료수캔이 누비고 다닌다
지하벽화 속의 푸른 말
달리고 싶은데
구파발은 종착역이다
서정춘, 하모니카
타향살이 몇 해던가 따위
철없이 부르고 싶은 때가 있다
서울에서 죽은 시인의 고향으로
길게 울고 가는 텅 빈 객차 한 칸
최잔화, 기다림은 힘이 세다
길들은 만들어지느라 없어지고
종일 해는 구름에 가려 내려오지 못하네
서리 맞은 늦가을 배추들
등을 세우고 기침을 쏟아내는데
옆구리 깊숙이 잠들어 있던
당신이 달그락거리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따뜻했던 온기가 늑골을 타고 기어오르네
어디쯤엔가 버리고 가야할 것 같은데
돌아오지 않을 이 길 위에 내려놓고 가야할 것 같은데
꽃 지고 열매를 기다린 시간들 사라지고
다 내어 준 빈 들은 기억의 티끌을 태우고 있네
노을 속으로 날아오르며 흰 새떼가 되어
내 몸을 친친 감네
낯선 정류장마다 당신은 말없이 서 있네
저 무덤가, 저 억새밭, 저 느티나무를 지나
박성우, 초승달
어둠 돌돌 말아 청한 저 새우잠
누굴 못 잊어 야윈 등만 자꾸 움츠리나
욱신거려 견딜 수 없었겠지
오므렸던 그리움의 꼬리 퉁기면
어둠속으로 튀어나가는 물별들
더러는 베개에 떨어져 젖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