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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행복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옷 없는 짐승들처럼 골목 깊은 곳에 단둘이 살 때
우리는 가난했지만 슬픔을 몰랐다
가을이 오면 양철 지붕 위로 감나무 주홍 낙엽이 쌓이고
겨울이 와서 비가 내리면 나 당신 위해 파뿌리를 삶았다
그때 당신은 내 세상에 하나뿐인 이슬 진주
하지만 행복은 석양처럼 짧았다
내가 흐느적거리는 도시 불빛에 익숙해지자
당신은 폐에 독한 병이 들어 내 가슴 속에 누웠다
지금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시간이 물살처럼 흐르는 사이
당신을 잃어버린 내게 남은 건
상한 간과 후회뿐
그때 우린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나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백열등 하나가 우리 캄캄한 밤을 지켜주던 나날
복효근, 어떤 화폐개혁
황금빛으로 떨어져 쌓이는 이것이
지폐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이 잎이 다 지폐라면
내 어찌 그 눈물뿐이던 옛사랑을
어여삐 그리워나 했겠나
오늘은
화폐개혁이라도 해서
은행이란 은행마다
모든 지폐란 지폐를 이 은행잎으로 바꾸어서
사람마다 가슴마다에
그리움 가득하게 했으면도 싶다
이동순, 양말
양말을 빨아 널어두고
이틀 만에 걷었는데 걷다가 보니
아, 글쎄
웬 풀벌레인지 세상에
겨울 내내 지낼 자기 집을 양말 위에다
지어놓았지 뭡니까
참 생각 없는 벌레입니다
하기사 벌레가
양말 따위를 알 리가 없겠지요
양말이 뭔지 알았다 하더라도
워낙 집짓기가 급해서
이것저것 돌볼 틈이 없었겠지요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양말을 신으려고
무심코 벌레집을 떼어내려다가
작은 집 속에서 깊이 잠든
벌레의 겨울잠이 다칠까 염려되어
나는 내년 봄까지
그 양말을 벽에 고이 걸어두기로 했습니다
장옥관,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어디서 피어오르는가
물안개 물에서 피어나고 메아리 첩첩 산에서 울려퍼지듯
사랑은 어디서 피어오르는가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곳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듯
너 없이도 혼자 피어오르는 것이
또한 사랑이어서
저 혼자 삭고 삭혀서
술이 되어 노래가 되어 입술을 적시니
오늘 나 옛 노래의 청라언덕에 올라
대지에서 피어나는 흰 나리처럼
내가 네게서 피어날 적에
네게서 내가 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내게서 피어오르는
기적을 만나느니
가지 꺾고 뿌리까지 파봐도
꽃잎 한 장 없는 나무에 봄마다 환장하게 매달리는
저 꽃들, 꽃들
박지웅, 푸른 글씨
언 강물 위에 사랑한다 쓴 글씨
날이 풀리자 사랑은 떠났다
한때 강변을 찾았으나 강은 늘 빈집이었다
그 푸른 대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다
어느 기스락에서 패랭이를 만나 패랭이꽃을 낳고
진달래와 한 살림 붉게 차리고 살다
그 꽃들 다 두고 어디로 가는가
객지에서 그대를 잃고
나 느린 소처럼 강변을 거닐다
혓바닥을 꺼내어 강물의 손등을 핥곤 했다
저문 강에 발을 얹으면
물의 기왓장들이 물속으로 떨어져 흘러가는 저녁
이렇게 젖어서 해안으로 가는 것인가
세상의 모든 객지에는 강물이 흐르고
그리하여 먼먼 신새벽
안개로 흰 자작나무 숲 지나
구름으로 아흔아홉 재 넘어 돌아가는 것인가
저문 강은 말없이 서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강은 언제나 옛날로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