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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전 엄마를 절대 원망하지 않아요. 제가 엄마였어도 분명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 생각해요.
정말 후회 안 하시는 거 맞죠? 전 엄마께서 행복하면 그걸로 만족해요. 엄만 자격이 있어요.]
종이에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깔끔하고 정갈한 글씨체가 나와 다행이었다.
비록 중간에 괜한 걸 적어 검게 지운 부분이 있지만,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오늘도 역시 예쁘게 단장을 하고 계시는 엄마. 바로 옆 아버지의 책상에 편지를 내려놓고 그것을 들어 안방을 빠져나왔다.
어린아이라도 드는 것마냥 가뿐하다. 엄마 혼자서도 들어올리실 수 있을 것 같다.
드라이기 소리마저 뚫고 들려오는 이 쇠파이프 긁는 목소리는 몇 개월이 지나도 적응되질 않는다.
귀를 틀어막고 싶어도 손이 모자란다. 그래도 오늘로 마지막이니까. 얼른 내려가서 시동을 걸어둬야겠다.
날이 추워 시트가 차가워졌을 것이다. 엄마가 앉으시기 전까지 데워둬야지. 이건 트렁크에 싣고.
....젠장. 아빠, 제발 조용히 좀 할 수 없으세요?
*
"남자가 살다 보면 실수로 하룻밤 정도 재미 볼 수 있는 거지. 나 이런 놈 인줄 모르고 좋다고 따라 온 니년이 병신천치인거야."
"......."
"왜 자꾸 귀 아프게 울고 지랄이야, 우라질 년이!"
"......."
"어쩌자고 이런 목석같은 년을 만나서... 씨발. 내 이 놈의 집구석 다신 들어오나 봐라."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에게 폭언을 퍼붓거나 엄마를 때리던 그 인간은 내가 열 살이 되던 해 집을 나가버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인간이 뱉고 간 누리끼리한 가래침까지 기억이 난다.
덩그러니 방바닥에 뱉아진 더러운 침을 보며 엄마랑 내 처지가 저 가래침과 뭐가 다를까 싶었다.
그 인간은 그렇게 당당하게 나갔으면서 다시 들어올 땐 다리 한 짝도 제 힘으로 디디지 못하는 처지였다.
뭐, 여기까진 뻔하디 뻔한 이야기다.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엄마가 그 인간의 장장 20년이 걸린 귀가를 누구보다도 기뻐하셨다는 것?
그렇게 입가가 찢어지도록 환히 웃으시는 얼굴은 처음 봤을 정도니까.
난 그런 엄마가 안쓰럽다거나 한심하지 않았다. 엄마의 미소에선 왠지 모를 기대감이 진하게 묻어나왔기 때문이다.
그 인간과 결혼하고 나서 엄마가 견뎌야 했던 나날들에 대한 보상을 줄 수 있는 건 안타깝게도 내가 아니었다.
난 그저 엄마의 발목을 잡고 있는 존재였다.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던 엄마께서 옆집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에 다녀오셨던 그 날, 엄마의 모든 게 바뀌었다.
제 시간에 자고 일어나 아침을 드시고, 얼굴에 분도 두드려가며 꽃단장을 하신 채 밖에 나가셨다.
난 그냥 엄마가 돌아오실 때 손에 들려 있던 우유맛 하드가 좋았던 것 같다.
아니, 그것도 좋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엄마의 미소가 제일 좋았다.
눈두덩에 시퍼런 멍을 달고 우시는 엄마, 토하고 울기만 하시던 엄마, 즐거운 듯 웃으며 내게 하드를 까 내미시던 엄마.
내 어린 시절은 모두 엄마의 울고 웃는 모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
엄마께선 마냥 신이 나 아침 일찍 나가셔선 밤 늦게 들어오셨다.
엄마께서 사들고 오시는 달달한 간식들은 좋았지만 어린 나는 너무도 외로웠다.
하루종일을 혼자 있어야 했던 나는 언젠가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렸던 기억이 난다.
엄마 가는 데 나도 데려가 달라고 찡찡대며 엄마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뺨을 맞았다.
지금이야 그 어린 시절의 내가 견뎌내야 했던 엄마의 행동들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하지만, 날 바라보시던 엄마의 얼굴만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엄마의 얼굴엔 그 인간을 바라볼 때마다 짓던 혐오스러운 표정이 그대로 떠올라 있었다.
엄마께선 그날 밤 집안이 떠나가라 우는 날 껴안고 함께 우셨다.
*
"재혁아, 아주머니들께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오..."
"아이구, 아들이 아주 똘망똘망하니 야무지게 생겼네. 수연 씨 닮았나봐."
"호호, 또 비행기 태우고 그러셔."
거짓말. 난 엄마랑 하나도 안 닮았는데. 엄마를 올려다보니 그저 웃고 계셨다.
공장엔 전부 아주머니들 뿐이었다.
*
집 밖으로 별로 나간 적이 없었던 나는 생전 처음 가 본 공장이 그저 신기했다.
거기서 머리에 흰 손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다소곳이 박스를 접으시는 엄마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문득 공장 안이 답답해질 때면 풀이 무성한 공장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곤 했다.
그 공장을 둘러싼 풀숲엔 유독 덩치 큰 암사마귀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날이 어두워지자 공장의 풍경은 낮과 사뭇 달라졌다. 엄마는 다른 아주머니들 속에 섞여 미친 듯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계셨다.
눈가가 검게 번지고 립스틱이 다 뭉개질 정도로 울고 계셨다.
누군가에게 잘못을 빌듯 마구 손을 비비며 눈물을 흘리시는 엄마의 표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괴로워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황홀경에 빠진 사람마냥 행복해하고 계셨다.
엄마는 미친 듯이 울며 미친 듯이 웃고 계셨다.
"여러분의 인생을 짓밟은 남성들로 인해 힘들고 괴로웠던 그동안의 시간을 천천히 떠올려 보십시오.
그렇게 떠올린 것들을 입 밖으로 수없이 되뇌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어느 새 당신의 눈에선 맑은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핏물 안에는 당신이 가진 모든 슬픔과 괴로움이 녹아 있습니다.
흐르면 흐르는 대로 그냥 흘려보내십시오.
이렇게 오늘 하루도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을 참으로 간단하게 씻어내 행복을 얻었습니다."
참으로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곡소리 속에서도 그 목소리에 취해 잠이 든 적도 많았다.
실컷 잠을 자고 일어나면, 엄마는 어느 새 깔끔해진 얼굴로 다시금 곱게 화장을 하고 계셨다.
눈이 조금 부어있는 것 말고는 언제나처럼 예쁜 엄마의 얼굴이었다.
그 때의 나는 그 공장에서 목격했던 모든 광경들에 대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어른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너희 엄마는 이상한 종교집단에라도 빠진 광신도냐는 질문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근데 뭐 어때. 난 오히려 그 '이상한 종교집단에 빠진'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엄마는 나를 공장에 데리고 간 그 날부터 오히려 그 인간이 떠났을 때보다 더욱 날 챙기셨고, 주말이면 나를 데리고 놀이공원이나 동물원에 가셨다.
엄마께서 차곡차곡 모으신 봉급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다.
저녁만 되면 엄마의 콧노래와 함께 맛있는 음식 냄새가 부엌에 가득 찼다.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집안에 웃음이 넘치기 시작하자 엄마와 나의 암울하기 그지없던 삶에도 볕이 들었다.
고생하신 엄마를 위해 성공해야한다는 일념 하나로 대학에 들어갔고, 회사에 취직했다.
월급이 나오면 애인과 함께 엄마를 모시고 맛있는 식당을 가거나, 엄마를 위한 크고 작은 선물들을 사드리는 데서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그 공장과 아주머니들께서 엄마와 내게 새 삶을 선물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
그 인간이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는 병신이 되어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의 일이었다.
엄마께서 무언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신건지 한껏 신난 표정으로 말을 꺼내시려던 순간이었다.
그 인간이 자꾸만 끼어들었다.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마실 물을 찾는 소리는 정말 들어주기 힘들었다. 그러게 담배 좀 작작 피우시지 그러셨어요.
엄마의 손이 가차없이 뺨을 내리치자 금방 잠잠해졌다. 참 예나 지금이나 시끄러운 건 여전했다.
엄마께서 다시 이어가신 이야기는 공장 아주머니와의 대화내용이었다.
"수연 씨, 이번에 미연 씨 이야기 들었어?"
"아, 들었어요. ‘교미’하셨다고요?"
"그래, 그거. 너무 부럽지 않아? 난 하고 싶어도 이제 그 새끼가 세상에 없는데."
"그러시구나.... 근데 그 ‘교미’라는 게 대체 무슨 뜻이에요?"
사마귀의 교미는 어딘가 섬뜩하다.
수컷 사마귀는 교미가 끝나면 자신보다 훨씬 강하고 덩치 큰 암컷 사마귀에게 잡아먹힌다.
특별한 원한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종족 번식에 중요한 영양분 섭취에 지나지 않는 행위였다.
그러나 그 공장에 사는 암사마귀들이 행하는 ‘교미’의 과정과 목적은 여느 사마귀들의 그것과는 퍽 다른 모양이었다.
종족 번식이 아닌, 궁극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의식.
여전히 그 공장엔 암사마귀들이 많았다.
*
날이 저물고 있었다.
엄마께선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리땁게 단장을 하셨다. 인생에서 제일 아름다웠을 그 시절 찍은 사진 속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온 느낌이랄까.
더없이 해사하게 콧노래를 부르시는 엄마를 보며 내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걸렸다.
‘교미’가 행해질 장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설렘 가득한 표정의 엄마와 한참동안 그동안 있었던 무수히 많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 속에 그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엄마와 나의 기억 속에서 그 인간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이따금씩 뒤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이 시간을 방해했다.
방지턱을 빠르게 지나가주었다. 덜컹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끔찍한 소리가 사라졌다.
숲길을 한참 달려 이젠 너무도 익숙해진 곳이 나왔다. 차를 세워 트렁크에서 여전히 시끄럽기만 한 그것을 공장 안 한가운데로 옮겼다.
아주머니들은 언제나 한결같은 미소로 그 자리에 서 계셨다. 참으로 감사한 분들이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입구에 서 계시던 엄마와 포옹을 나누었다.
"손 조심하시고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바로 저 부르셔야 해요."
"응, 내 착한 아들. 고마워."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가시는 엄마의 핸드백 안에서 노란색 편지지가 언뜻 보여 슬쩍 웃음이 났다.
하얀 손수건에 싸인 것에 손이나 다치지 않으실까 걱정이었다.
굳게 닫힌 철문에 등을 기댔다.
나는 이 공장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에 감사했다. 오늘 밤 이후로는 평생을 감사하며 살겠지.
등 뒤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더욱 크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귀를 막았다 떼니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만이 주위에 가라앉아 있었다.
출처 | 제 머릿속 / 항상 공게 눈팅만 하다 문득 오유 가입 후 처음으로 글을 써 보았어요! 쓰고보니 공포가 아니네요....ㅎ 많이 부족해도 감안해 주시고...헤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