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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풍경소리
뒤로 벌렁 드러누워
나는 처마 밑의 풍경을 본다
대숲을 쓸어온 바람은
풍경에 매달린 고기를 흔든다
고기는 부는 바람에 몸을 비틀며
참다가 참다가 드디어
종소리를 좌르르 쏟아놓고야 만다
바람은 그제야
할 일 했다는 듯
다른 곳으로 떠나가고
구리로 만든 고기의 등짝에는
아침 볕이 눈부시게 비친다
문정희, 돌
나는 좀 돌 같은 인간이다
물결무늬 점점이 박힌 현무암쯤으로 뭉쳐진 돌이다
끝내는 부서져 바람이 되겠지만
좀체 씻겨지지 않는 뼈가 솟아 있다
이 뼈가 무엇일까
살아 있는 동안 나의 화두는 그것이다
떠돌이 별이었다가
폭풍을 굴리는 꽃이었다가
사랑의 빗금으로 일어서는
나의 뼈는
늘 탑이 되고 싶다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저 끝에서 달려오는
빗방울들의 신음 소리와
감히 허공을 받쳐 들고
남혜숙, 선인장
단단한 몸 날카로운 가시
거짓말이다
넓은 잎에 화려한 꽃
거짓말이다
모른다
저 몸속 가득찬 끈끈한 눈물
김종해, 동안거(冬安居)
한겨울의 석 달 동안은
세상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요리를 한다
눈을 감으면, 눈 밑에 잠든 숲과 평원
채찍을 든 매운 바람 속을 지나
눈덩이 속 이글루 안에 나 어느덧 혼자 있다
모자를 벗고 언 손을 녹인 뒤
얼음 도마 위에서 칼질하는 요리사
어젯밤 눈 속에 파묻어 둔
상형문자가 된 짐승의 내장
한 획, 한 줄의 온기를 적출하라
그러나 나는 먹지도 못하는 시를 쓰는구나
눈 덮인 한 장의 평원 위에
누구의 한 끼 보시도 못할 붓질을 하는구나
눈 감으면 하늘 위에 얼어붙은 야밤의 오로라
눈을 가리지 않았음에도
한겨울의 극지(極地)는 어둡고
허기진 깨달음은 언제나 외롭고 목이 마르다
나희덕, 명랑한 파랑
한 개의 청바지는 열두 조각으로 만들어지지
또는 열다섯 조각 열일곱 조각
안팎이 다르게 직조된 청(靑)처럼
세계는 흑백의 명암을 선명하게 지니고 있어
질기고 질긴 그 세계는
일부러 찢어지거나 해지게 만드는 공정이 필요해
한 개의 청바지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에 푸른 물이 들어야 하는지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만든 청바지 속에 들어가보지 못했지
그들의 자리는 열두 조각 중 하나
또는 열다섯 조각 중 하나, 열일곱 조각 중 하나
명랑한 파랑을 위해
질기고 질긴 삶을 박고 있을 뿐
미싱 위에서 부표처럼 흔들리며 떠다니고 있을 뿐
푸른 혓바닥처럼 쌓여 있는 피륙들
조각과 조각이 등을 대고 만나는 봉제선들
주머니마다 발굽처럼 박히는 스티치들
우연처럼 나 있는 흠집이나 구멍들
공장 곳곳에서 돌아가는 검은 선풍기들, 검은 눈들
방독면을 쓰고 염색약을 뿌리는 사람들
적당한 탈색을 위한 작은 돌멩이들
세탁기에서 나와 쭈글쭈글 말라가는 청바지들
다리미실을 지나 한점 주름 없어지는 세계
마침내 라벨을 달고 포장을 마친
명랑한 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