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숙, 쓸쓸함을 위하여
어떤 시인은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 하고
어떤 화가는 평면을 보면 모두 일으켜세워
그 속을 걸어다니고 싶다고 한다
나는 쓸데없이 널려 있는 낡은 널빤지를 보면
모두 일으켜세워 이리저리 얽어서 집을 짓고 싶어진다
서까래를 얹고 지붕도 씌우고 문도 짜 달고
그렇게 집을 지어 무엇에 쓸 것인진 나도 모른다
다만 이 세상이 온통 비어서 너무 쓸쓸하여
어느 한구석에라도 집 한 채 지어놓고
외로운 사람들 마음 텅 빈 지어놓고
그 집에 와서 다리 펴고 쉬어가면 좋겠다
때문에 날마다
의미 없이 버려진 언어들을 주워 일으켜
이리저리 아귀를 맞추어 집 짓는 일에 골몰한다
나 같은 사람 마음 텅 비어 쓸쓸한 사람을 위하여
이 세상에 작은 집 한 채 지어놓고 가고 싶어
김경성, 나무의 유적
얼마나 더 많은 바람을 품어야 닿을 수 있을까
몸 열어서 가지 키우는 나무
나뭇가지 부러진 곳에 빛의 파문이 일고 말았다
둥근 기억의 무늬가 새겨지고 말았다
기억을 지우는 일은 어렵고 어려운 일이어서
끌고 가야만 하는 것
옹이 진 자리
남아 있는 흔적으로 물결무늬를 키우고
온몸이 흔들리도록 가지 내밀어
제 몸속에 물결무늬를 그리는
나무의 심장을 뚫고
빛이 들어간다
가지가 뻗어나갔던
옹이가 있었던
자리의 무늬는, 지나간 시간이 축적된
나무의 유적이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고
무늬의 틈새로 가지가 터진다, 잎 터진다, 꽃 터진다
제 속에 유적을 품은 저 나무가 뜨겁다
나무가 빚어내는 그늘에 들어앉은 후
나는 비로소 고요해졌다
최영철, 비밀
반찬거리 파는 할머니
조르지도 않았는데
주위 눈치 보며 얼른
새싹 몇 잎 더 넣어준다
할머니와 나만 아는 비밀
다른 사람 절대 알아선 안 되는
무슨 돌이킬 수 없는
불륜이라도 저지른 듯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문태준, 징검돌을 놓으며
물속에 돌을 내려놓았다
동쪽도 서쪽도 생겨난다
돌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옆이 생겨난다
옆에
아직은 없는 옆이 생겨난다
눈썰미가 좋은 당신은
연이어 내려놓을 돌을 들어올릴 테지만
당신의 사랑은 몰아가는 것이지만
나는 그처럼 갈 수 없다
안목이여
두 번째 돌 위에 있게 해다오
근중한 여름을 내려놓으니
호리호리한 가을이 보인다
정하해, 간절기에 들어
옷가지 두어 벌, 세탁소 보내려다
주머니마다 턴다
털어도 뻔한 먼지밖에
나오지 않는데
손이 들고 났던 자리 보푸라기 피어 몽글하다
아무튼 이것들은
철따라 나를 태워다 나르던 급행이었을 것이다
시절에서 내리면
가차 없는 용도불가를 당하는
너라는 것, 이미 식어 버려 뜨거운 인사도 못했다
섭섭함에도 급수가 있는지
오래도록 나는
그 냄새, 숭숭 햇살이 디디던 길이 보인다
그래, 단단히 침묵하여라
그 안에 수만 여벌의 내가 맡겨져 있으니
지금 나의 본체는
잠자리 날개 안에서 잔뜩
무게 줄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