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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돌과 포도나무
옆에서 포도나무 넝쿨이 뻗고 있다
돌 위로 포도나무 넝쿨 그림자가 내리고 있다
내리는 공간이 보슬비 내리는 때처럼 가볍다
나는 너에게서 온 여름 편지를 읽는다
포도나무 잎사귀처럼 크고 푸른 귀를 달고 눕고 싶다
이런 얇고 움직이는 그림자라면 얻어 좋으리
오후에는 돌 위가 좀 더 길게 젖었다
포도나무 잎사귀처럼 너는 내 속에서 자란다
정호승, 늪
지금부터
절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겠다
남은 시간이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희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겠다
절망에는 늪이 없다
늪에는 절망이 없다
만일 절망에 늪이 있다면
희망에도 늪이 있다
희망의 늪에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가득 빠져 있다
이동순, 숲의 정신
봄이 되자 플라타너스는
단단한 자신의 가슴을 열어서
많고 많은 씨앗의 군단을 바람에 날려 보낸다
솜털 보송보송한 씨앗들은
산 넘고 개울 건너 우리가 상상도 못한 먼 곳까지
큰 뜻을 품고 날아가 뿌리를 박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상의 숲이란 숲은 모두 이렇게 해서 생겨 난 것
이 수풀 속에서 오늘도 어린 싹은 자라고
숲을 거니는 사람들은 큰 나무 밑동 두 팔로 안아보며
감개무량한 얼굴로 세월을 더듬는다
김종해, 바늘귀
틑어진 단추를 달기 위해
고희를 넘긴 아내가
바늘귀에 실을 꿰어 달라고 한다
예닐곱 살 때 어머니의 바늘귀에
직방으로 꿰었던 그 실이
오늘 내 손끝을 달군다
어머니의 푸른 하늘을 꿰차며 날던
그 방패연과 실꾸리
아내가 내민 바늘귀에 실을 꿴다
돋보기를 쓰고도 바늘 구멍을 찾지 못해
나는 허둥댄다
갈 길을 찾지 못해
바늘귀 바깥에서 헛짚는 시간
바늘귀 하나 꿰지 못하는 나는
무엇을 잃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바늘귀가 내 앞에 절벽처럼 서 있다
김윤현, 도토리
미끄러지는 곳에서 생은 늘 시작된다
떨어져 구르다가 머무는 곳이 터전이다
부딪히지 않으려 몸가짐을 둥글게 하다가도
가을이 오면 도토리는 낮은 곳으로 구른다
다람쥐 눈에 띄지 않게 낙엽이 덮어주는 곳도
추워지면 마른 풀이 포근히 감싸주는 곳도
가슴 넓은 흙처럼 낮고 낮은 곳이다
낮은 곳에서 꿈을 다시 꿀 수 있어
도토리가 짓는 표정에는 주름 하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