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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성, 파문
물길 솟는 우물 밑바닥
너무 깊은 곳까지 두레박 던져
물이끼 흔들며 퍼 올린 물
마실 수 없다
중심까지 파고드는 일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바다 밑에서 퍼져 올라오는
바랜 빛깔
푸른 기억으로 남는 것은
언제나 스치듯 지나가는 풍경이었듯이
어쩌면 눈에 보이는 가까운 곳이
가장 깊은 중심일지도 모르는 일
가만히 퍼 올린 우물물
너의 눈빛처럼
서늘하다
신정민, 맨 처음
사과는
사과꽃에 앉은 벌의 더듬이가
맨 처음 닿은 곳에서 썩기 시작한다
바람이 스쳐간 곳
햇볕이 드나들며 단맛이 돌기 시작한 곳
맨 처음 빗방울이 떨어진 곳
사과는
먼 기찻길에서 들려온 기적소리
사과의 귀가 맨 처음 열린 곳에서 썩기 시작한다
익어가는 거야
씨앗을 품고 붉어지기 시작한 곳에서
사과는 썩기 시작한다
썩고 있는 체온으로 벌레를 키워
몸 밖으로의 비행을 꿈꾼다
온 힘을 다해 썩은 사과는
비로소 사과가 된다
정하해, 한때
부르텄다, 라일락
봄이 얼마나 치대었는지 알 것 같다
몇 날을 미친 듯 까발려진
천치 같은 것
모든 게 끝장나도 좋음을
발설하고 싶은
때가
일어나고 있다는 게 병은 아닐 것이라는
장이 무르도록 쑤시던
그 아픔이 급성장염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때가
더러 있었다
전동균, 선물
밤새 장대비 퍼붓고
무성한 털 곤두세운 채 웅크린 뒷숲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지
빗줄기의 감옥을 뚫고 땅을 찢듯
구슬픈 짐승 울음소리가 들려오곤 했습니다
눈 퉁퉁 부은 아침빛의 문간에
칡잎 한 장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흙 한 점, 물기 한 점 묻지않은
눈망울 또록한 초록의 얼굴
그러나 어떤 싸움의 흔적처럼
한쪽 귀 갈가리 찢긴 그 이파리를
가만히 두 손으로 받쳐 들었습니다
내가 빚어지기 전의 생, 혹은
사후(死後)의 말을
엿듣기라도 하듯
심인숙, 생은 물고기처럼
달 속을 헤엄쳐 오는 물고기가 있어요
레일의 물보라를 철벅이며 순간
눈 앞에 멈춰서요
비늘창 너머 드문드문 자리가 보여요
치마폭에 공작새를 두른 할머니가 졸고 있어요
모형지구본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한 꼬마가 웃고 있네요
호른을 부는 여자는 검은 광대뼈가 솟아올랐어요
어둠이 히야신스처럼 피어나요
객차번호가 달그림자 속에 잠시 가라앉았다 떠올라요
달의 향기가 저럴까요
비늘을 털며 천천히 지느러미를 펴는 커다란 물고기
노래처럼 반짝거려요
이곳은 한 줄기 바람도 없어요
캄캄한 역에 나와 우두커니 서 있어요
어디선가 한꺼번에 꽃이 지고 있네요
기다리는 기차는 오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