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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전범의 최후
게시물ID : history_85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릴케
추천 : 6
조회수 : 272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4/28 04:30:15
"백명의 죽음은 재앙이지만 만명의 죽음은 통계에 불과하다"

아돌프 아이히만

1906. 3.19. ~ 1962. 5.31. 나찌 당원, 나찌 무장친위대 중령, 홀로코스트 실행책임자 중 한명. 그의 우수한 조직관리 능력과 나찌 이데올로기에 대한 충성심을 높게 평가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동유럽의 게토 및 절멸캠프에 유대인을 이송하는 책임자로 발탁했다. 전후, 적십자의 난민용 여행허가서(laissez-passer)를 사용해 1 2 아르헨티나로 도주한 아이히만은 신분을 위장하고 현지의 메르세데즈 벤츠사에서 근무했으나 1960년 모사드에게 체포되었다. 이스라엘로 압송된 아이히만은 인도에 대한 범죄, 전쟁범죄를 포함한 15개 죄목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고 1962년 사형당했다.
     
나찌 경력

아이히만은 아버지의 친구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소개로 1932년 오스트리아 나찌당에 가입하고 11 (당원번호 889,895) 친위대(Schutzstaffel, SS) 후보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친위대원 번호 45326으로 정식대원으로 살츠부르크에서 훈련을 받고 일반친위대원(Allgemeine SS)이 되었다.  1933년 나찌당이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던 시절에 아이히만은 33년 8월부터 34년 9월까지 레히휄트와 다하우에서 ‘오스트리아 부대’로 훈련을 받았는데 관료주의와 군사훈련에 실증을 느껴 SS 보안국에 전출을 신청했다. 1934년 9월 나찌 내무부 SD의 프리메이슨 담당부서로 이속된 아이히만은 이곳에서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친구 레오폴드 폰 밀덴스타인 친위대 소위가 과장으로 있던 SD 베를린 총국의 유대 부서에 스카웃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12 13

1934년 11월 베를린으로 옮긴 아이히만은 1935년 총분대장으로 승진하는 등 출세가도을 달리기 시작해 14 1937년에는 친위대 소위로 진급했다. 그 해에 아이히만은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를 더욱 확대하기 위해 하이드리히의 허가를 받아 유대인 이주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영국령 팔레스타인 식민지에 파견되었다. 그는 카이로에서 유대인 민병조직 하가나 멤버들과 접촉해 이주에 관한 제반사항을 논의했으나 15 아랍 계 지도자들이 접촉을 거부하고 영국 식민성도 유대인 이주를 거부한데다 나찌 내부의 방침도 바뀌면서, 결국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문제는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빈과 프라하

1938년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합병되자 비엔나에 파견된 아이히만은 이곳에서 SS조직 구성에 공을 세워 친위대 중위로 승진했고 유대인 관리총국에서 오스트리아 내 유대인을 축출하는 ‘전문가’로 떠올랐다. 당시 아이히만은 오스트리아에서 망명을 원하는 유대인들의 재산을 전부 몰수하는 정책을 실시해 1938년 10월 21일의 보고서에서는 9월말까지 반년만에 5만명의 유대인을 추방했다고 적었다. 같은 시기의 독일에서 추방된 유대인 수가 19,000명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상당한 성과였다. 그와 함께 그의 근무 평점도 높아지면서 ‘남다른 협상능력, 화술, 조직력’이나 ‘정력적이고 기민한 활동이 두드러지며 관리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유대인 이주문제의 권위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헤르만 괴링(당시 명목상으로는 괴링이 유대인 문제의 총 책임자였다.)이 1939년 1월 설립한 베를린 내무부의 ‘유대인 이주 중앙본부’가 아이히만의 방침을 독일 전국에 확대하는 등 그 능력을 인정받은 아이히만은 1939년 3월 합병된 체코의 옛 수도 프라하에 파견되어 이곳에서 유대인 이주 총책임자가 되어 새로 조직을 구성했지만 이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2차대전

2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친위대 대위로 진급한 아이히만은 1939년 제국보안총국(Reichssicherheitshauptamt)이 창설되자 베를린으로 돌아와 유대인 제거 전담인 제4과 국장이 되었다. 16 17 18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면서 독일의 지배영역이 급격히 확대되자 독일의 지배영역내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수도 약 325만명으로 급증해 그들의 처리 문제가 심각해지자 이듬해에는 마다가스카르 프로젝트(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전원 강제 이주시키는 계획)에 착수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19 1940년 말 SS 소령으로 진급한 아이히만은 1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중령으로 진급했는데 이 시기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독일 점령지역내의 유대인은 전원 살해하도록 지침을 내리면서 아이히만의 대유대인 방침도 ‘최종 해결’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20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1942년 1월 20일, 하이드리히는 아이히만에게 유럽 내 유대인의 제노사이드를 공식적으로 결정하게 될 ‘반제 회담’에 회의록 작성 담당 비서로 참석시켰다. 이 회담 이후에 그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의 수송부서 책임자가 되었으며 1942년 3월 6일과 10월 27일의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위한 부처간 회의’에서는 아이히만이 의장을 맡았다.

1942년 3월 부터 절멸 수용소로 이송이 시작되자 그 프로젝트의 핵심이 된 아이히만은 유대인들을 점령지인 폴란드 내의 수용소로 이송하기 위한 모든 열차 운영권한을 이임받아 국가 총력전 태세로 혼잡하던 독일에서 교통부와 절충해 열차를 확보하는 수완을 보이며 2년간 500만명의 유대인을 기차로 날라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1944년 아이히만은 소련군이 도달하기 전, 독일이 점령중인 헝가리에 파견되어 유럽 유대인을 서구 연합국의 트럭 및 기타 물자들과 교환하기 위한 교섭에 착수했으나 긍정적인 답변을 받지 못하자 다시 유대인 제거에 착수해 불과 2달만에 147개의 열차를 동원해 약 43만명의 헝가리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인도했다. 1945년 하인리히 히믈러가 유대인 학살을 중단하고 최종해결에 관련된 모든 증거물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아이히만은 히믈러의 변심에 반발해 공식적인 명령을 무시하고 헝가리에서의 작업을 계속했다. 그와 함께 독일의 마지막 군사적 발악에 말려드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헝가리에 남아 무장친위대 지휘관으로 실전 지휘 임무도 맡았다.
종전 이후

1945년 독일의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소련군을 피해 헝가리에서 도주한 아이히만은 오스트리아로 옮겨 이곳에서 옛친구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를 만났으나, 칼텐브루너는 아이히만과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연합군에 절멸 작전의 책임자로 그를 지목했다.

2차대전이 끝날즈음에 아이히만은 미군에게 체포되었지만 '오토 에크만'이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1946년 초 미군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이후 독일 남부의 휴양지 뤼네부르크 히스의 작은 마을 알텐살츠코스에서 몇년간 은신해있던 아이히만은 1948년 아르헨티나 입국허가를 획득하는데 성공하고 도주의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1950년 초 이탈리아로 건너간 아이히만은 초창기의 추축국 전범들의 도주루트 개척자들 중 한명인 알로이스 후달 추기경과 친분이 있는 한 프란치스코 회 수도사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난민자격을 취득했다. 이로써 아이히만은 '리카르도 클레멘트, 기술자' 앞으로 발행된 이탈리아 제네바 발행의 국제 적십자사 인도주의 여권을 취득하고 21 아르헨티나 비자를 얻었다.  1950년 7월 14일, 아르헨티나행 배에 승선한 아이히만은 이후 10년간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처에서 공장 관리자, 중견 수도공, 전문 토끼 생육가 등등 몇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심지어 가족들도 아르헨티나로 불러들였다.
체포

건국 1년뒤인 1949년, 이스라엘은 공식첩보부 모사드를 창립했는데 초창기 모사드의 주요 업무중에는 나찌 전범을 추적해서 기소하는 것도 있었다. 1950년대에 수많은 유대인과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이 아이히만을 비롯한 악명높은 나찌 전범들의 추적에 헌신하고 있었고 그 중에는 시몬 비젠탈이 있었다. 1954년 비젠탈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거주하는 지인에게서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있다는 전보를 받았다. 전보의 내용은 부분적으로 공개된 바에 의하면 Ich sah jenes schmutzige Schwein Eichmann. ("더러운 아이히만 놈을 보았네.") Er wohnt in der Nähe von Buenos Aires und arbeitet für ein Wassergeschäft.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처에서 물회사 직원으로 일하고 있더군.")라는 것으로 이 전보를 포함해 비젠탈이 수집한 정보들을 토대로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의 소재지에 대한 확고한 단서들을 확보했다. 하지만 모사드 국장 이제르 하렐은 나중에 출간되지 않은 문서에서 비젠탈이 아이히만의 ‘소재 확인에 도움을 준 것이 없’으며 오히려 아이히만 작전을 위험에 빠트렸고 요제프 멩겔레 체포 계획을 중단하는 계기만 만들었다고 적어놓았다. 22 또, 아이히만 본인은 가명을 사용했지만 아내와 자식의 이름은 바꾸지 않았으므로 이것이 그의 체포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23

아이히만의 정체를 밝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로타르 헤르만의 정보였다. 그는 유대민 이주자 출신 노동자로 다하우 수용소에서 아이히만이 감독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아이히만을 본적이 있었고 나중에 독일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헤르만은 1950년대부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가족들과 함께 새 삶을 꾸리고 있었는데, 그의 딸인 실비아가 아이히만 가족과 친분을 갖게 되었고 클라우스 아이히만과 연애를 시작했다. 클라우스는 아버지가 나찌였으며 홀로코스트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1957년 헤르만은 독일의 전쟁범죄자들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아이히만의 진정한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곧 헤르만은 실비아에게 아이히만의 집에서 사실을 알아오게 했고 결국 아이히만 본인을 만날 수 있었다. 클라우스가 집에 없다는 걸 알고 그가 아버지를 확인하자 아이히만이 확인해 주었다. 헤르만은 즉시 헤센 서독 정부의 주 감독관이었던 프리츠 바우어와 접촉해 아이히만의 삶에 관한 상세 정보를 제공받았다. 헤르만은 이후 이스라엘 정보요원과 접촉해 이후 수년간에 걸쳐 아이히만에 대한 내용을 확인하고 그를 체포할 계획을 세웠다.

1959년 모사드는 아이히만이 부에노스 아리에스에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지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정확한 위치 추적에 나섰다. 24 면밀한 조사 끝에 리카르도 클레멘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이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린 이스라엘측은 아이히만 체포를 위한 협력 작전을 승인하고 그를 전쟁범죄자 혐의로 예루살렘에 불러들이기로 결정한다. 모사드와 신 베트의 협력하에 이스라엘은 1960년 1월 내내 아이히만을 감시했으며 그가 3월 21일 25번째 결혼 기념일에 아내에게 꽃을 배달하는 것도 중요한 단서였다.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외에서 모사드와 신베트 요원들에게 체포되었다. 25 아이히만의 정체를 확인한 1960년 4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한 모사드 요원들은 추가적인 관찰을 수행한 뒤, 일단의 요원들을 배치해 메르세데스 벤츠 공장에서 근무하던 아이히만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모사드의 작전은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아이히만을 체포한다는 것이었고 번호판을 위장한 지원 차량도 준비되었다. 그들로서는 아이히만이 사라지기 전에 체포할 수 있을지가 확실치 못했다. 

아이히만이 집에 갈때 항상 이용하던 버스에서 아이히만이 보이지 않았을 때 계획은 거의 중지될 뻔 했다. 게다가 고장난 자동차를 수리하는 척 위장하고 있던 모사드 요원들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아서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하지만 거의 30분이 지난 시점에 아이히만이 버스에서 내렸다. 모사드 정보요원이 그에게 접근해 스페인어로 잠시만 시간 좀 내주겠냐고 말했을 때 아이히만은 놀라서 도망치려 했지만 모사드는 그에게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비추었다. 모사드 요원 2명이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땅에 눕힌 뒤 자동차로 데려갔다. 차에서 그는 모사드 요원들에게 ‘나는 이미 내 운명을 받아들였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위조번호판으로 경찰의 검문을 피한 모사드 요원들은 아이히만을 안전 가옥까지 데려갔다. 그곳에서 아이히만은 의자에 묶이고 재갈을 풀린 채 심문을 받았다.

클레멘트가 아이히만임이 확실하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아이히만은 즉각 처형되던지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을지를 선택하도록 했다. 아이히만이 재판정에 서겠다고 하자 요원들은 아르헨티나 당국의 감시를 벗어날때까지 안전가옥에 가둬두었다. 아이히만에게 약을 투여하고 술에 취한 것처럼 꾸민 다음 승무원 복장을 입힌 모사드 요원들은 그를 아르헨티나 독립기념일 행사에 참석했다가 돌아가는 이스라엘 정부관계자들을 귀국시키는 엘 알 브리스톨 브리타니아 항공기에 태우고 다카르를 경유해 1960년 5월 21일에 이스라엘로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26

한동안 이스라엘 정부는 아이히만 체포에 관한 모든 내용을 부인했으며 아이히만을 이스라엘 당국에 넘기려고 하는 유대인 지원자들에 의해서 그의 체포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아르헨티나 과격우파들 사이에서 반유대주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극우파인 타쿠아라 민족주의들은 고문, 습격, 폭탄테러, 납치를 자행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수상 벤 구리온과 아르헨티나 대통령 아르투로 프론디지는 협상에 들어갔다. 27

벤 구리온은 이스라엘 국회 크네셋에서 5월 23일 아이히만의 체포에 관한 내용을 발표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작전의 총 책임자인 모사드 국장 이제르 하렐이 가리발디 가의 자택에서 아이히만의 체포에 관한 책을 저술하고 있다. 이 책은 동명의 영화가 되었다. 몇년후 납치팀의 일원이었던 피터 말킨은 ‘내가 체포한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저술해 아이히만의 성격과 동기들을 기록했으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처형

아이히만은 1962년 5월 31일, 라믈라의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일반적으로 사형 선고를 하지 않는 방침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사형이 집행된 사건으로, 아이히만은 마지막 식사를 거부하고 대신에 이스라엘 산 적포도주 카르멜을 반병 정도 마셨다. 또, 사형집행 전에 전통적으로 입히는 검은 두건도 거부했다.

아이히만의 유언에 대해서는 몇가지 논란이 있는데 예컨데,

독일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랫동안 살았던 나라들을 잊지 않겠다. 나는 전쟁의 규칙과 정부에 복종했을 뿐이다. 나는 준비되었다. 42

런던 대의 왕립 홀로웨이 역사 연구소 교수이며 저명한 홀로코스트 역사가인 다비드 케사라니는 그의 마지막 말이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이 세 나라는 내가 가장 많이 연관되었고 잊지 못하리라. 아내와 가족, 친구들에게 인사했다. 나는 준비되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우리는 곧 다시 만날 것이다. 나는 신을 믿으며 죽는다. 43

처형당한뒤 얼마 후 아이히만의 시신은 특별히 준비된 절차에 따라 소각되었는데, 소각로는 누구도 감히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고 길게 설치된 트랙을 통해 시신이 투입되었다. 이튿날인 6월 1일, 그의 재는 이스라엘 수역 밖의 지중해에 이스라엘 해군 경비정이 뿌렸다 .이것은 어느 나라도 그의 사망지를 차지할 수 없고 어떤 기념 행사로 열릴 수 없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사후평가

빨갱이를 전부 죽이라고 하건, 이름이 K로 시작되는 인간은 다 죽이라고 하건, 명령을 받으면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다. – 시몬 비젠탈 

그렇게 까지 영혼을 팔아버린 상태의 사람을 지금까지 본적이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지적수준이 매우 높은 사람들을 상대해 왔었지만 하지만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존재감이 없는, 하나부터 열까지 협조적으로 불편을 주지 않고 때로는 자발적으로 협조하기도 하는 얼빠진 사람이었다. – 모사드 장관 이제르 하렐 

만약 그가 더 인간적이었다면 그의 인간성은 그런 사악한 계획에 협조하는 것을 용납치 않았을 것이다. 그가 더 비인간적이었다면 업무능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중간에 해당해서 버튼을 누르라고 하면 버튼을 눌렀을 때 어느 누가 죽더라도 상관하지 않는 그야말로 진부한 인간 그 자체였다. –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하임 

아이히만의 문제는 과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히만의 후예이며 최소한 아이히만 적 세계의 후예이다. 우리는 조직속에서 무책임한 톱니바퀴처럼 작동하고 있으며 도덕성이 조직에 대항하지 못한다면 모두가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 철학자 귄터 안데스 

아이히만은 사실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로 이것은 대량 학살의 중요한 동기였다. - 다비드 체자라니 

2차대전 이후에 태어난 아이히만의 아들 리카르도는 부친의 행동을 비난하고 이스라엘의 처형에 대한 억울함은 없다고 말했다. 리카르도는 독일에서 고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http://armishel.tistory.com/m/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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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침략으로 희생된 우리민족의 수는 얼핏 잡아도 수백만명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까지도 반성은 커녕 침략 자체를 부정함과 동시에 정당한 행위였다고 주장한다 해방과 함께 전범과 친일파들을 색출 단죄하지 못한게 현재까지 친일파 잔재의 근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가 나치 전범 아인리히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외교 관례까지  무시하며 체포한거와는 너무나 비교 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친일파들이 오히려 득세하는 시대가 되버렸다.친일파 살인마 아인리히가 아직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의 말을 되짚어보자
'백명의 죽음은 재앙이지만 만명의 죽음은 통계에 불과하다'   친일제국 시대 우리민족은 수백만이 살해 당했다 그들에겐 그저 통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국내 친일파들도 아직 반성하지 않고 있다
되려 친일파들의 논리를 인용 정당함을 주장하고 있다  
프랑스는 4년의 나치 침략을 당했지만 이후 드골 정권은  수백만의 나치 부역자를 잡아 그 중 수십만은 징역 수천은 사형을 시켰다
친일파들이 변명하는 조금이란 핑계는  프랑스에선 통하지 않았다  나치 부역자들을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함과 동시에 처벌이 이루어진 것이다
광복 이후 김구 선생이 대통령이 됐다면 지금쯤 친일파 따위가 어디 감히 나섰을 수 있었을까  굴곡진 역사의 슬픔속에서 나는 오늘도 그런날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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