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선, 황새
황새가 무논에 잠시 내려와 쉬어갈 때
결코 두 발을 내려놓지 않는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듯이
내린 두 발에 뿌리라도 내릴까 봐 주저하는 듯이
하늘이 제 집인 줄 알고 드나드는 새는
두 발이 있어도 하늘에 머문다
먹이 사냥을 할 때만 잠깐씩 내려와
지상의 것들을 입질할 뿐이다
아주 그 맛에 길들어버릴까 봐 주저하는 듯이
일탈을 꿈꾸며 지금 내 앞에 머무는 당신도
지나가는 바람이라면
두 발 모두 내려놓지 마십시오
한 발은 문 밖에 걸쳐두십시오
최영철, 애벌레의 밤
땅속 깊이 묻혀 있었네
사정없이 할퀴고 간
겨울을 뒤집어쓰고 있었네
아무에게도 무섭다 춥다 어둡다
말하지 않았네
해 뜨면 금세 날아갈 눈물
비가 데리고 갔네
아무 데나 짖어댄 저 달
사랑이 궁하기로서니
마구 꼬리를 흔들 일은 아니었네
별은 가지와 가지 사이를
너무 빨리 옮겨 다녔네
밤이 깊어지기도 전에
바위는 제 눈을 닫아걸었네
종종걸음으로 물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버렸네
천둥은 너무 큰 소리로
제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네
가난과 어두움이 달아날까 봐
나는 아무 노래도 부르지 않았네
신현정, 훠이훠이
갈대밭이 키를 가렸다
나는 키를 가린 갈대밭에서 손을 높이 올렸다
손이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손을 놓고 싶었다
하늘 저 쪽으로 한 마리 들기러기로 띄우고 싶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손이 어디인가로 자꾸 쏠렸다
나, 세상 밖에까지 가서는
손을 훠이훠이 내젓다가 오고 싶었다
김경성, 맷돌
왜, 너의 가슴속으로 들어간 것들은 모두
가루가 되거나, 즙이 되거나
덩어리 하나 없이 그렇게 다 부서져 버리는지 몰라
슬픔이 너무 커서
무언가를 부서뜨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지
가루가 되지 않거나, 즙이 되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들은
너무 깊은 상처 덩어리이거나
처음부터 네 마음의 입구가 어디인지 모르고 덤볐기 때문이지
단단하게 옭아맨 어처구니 붙잡고
마음 가는 쪽으로 기울어지다 보면 슬픔도 가벼워질 적이 있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든가, 쓸쓸함 같은 것
때로는 덩어리째 꿀꺽 삼키고
폭탄 같은 너의 가슴에 기대어서
무작정 함께 빙글 빙글 돌고 싶어
슬픔이 섞여서
가벼워질 때까지
권정우, 푸른 기억
새살에서
향기가 난다
딸아이와 함께
어머니 문병 가는 길에 맡곤 하던
매화 향기는 꽃잎과 함께 흩어졌지만
그 자리에
매실이 자라고 있었다
열매가 익으면서
꽃향기를 그대로 기억해 내듯이
딸아이도 점점
내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다
새살은
다른 몸에 난 상처까지 어루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