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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근현대사 315의거
게시물ID : history_85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ss989
추천 : 2
조회수 : 3246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4/28 04:08:23

 

 

 

 

 

마산 3.15의거

"청년은 두번 오지 않고 하루는 다시 새벽이 없다" 1961년 4월22일. 3.15마산의거 첫돌을 맞아 '한국국사연구회'가 발간한 '마산의 혼'책에서

땅! 땅! 땅!

인구 13만명의 마산시내에 울려 퍼지는 총소리. 1960년 3월15일 밤 나는 그날 밤을 잊을 수 없다. 당시 우리집은 마산경찰서(현 마산중부 경찰서)근처에 있었고 월영초등학교 3학년 개학을 앞두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밖에 나갔다가 오셔서 절대로 나가지 말라고 하셨다. 나가면 죽는다고...

다음날 거리에 나가 봤더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불에 탄 경찰짚차가 마산역 광장(현 월포 벽산블루밍 아파트 단지)에 뒹굴어 있었고, 파괴된 경찰서. 수많은 자갈돌과 서류들이 길바닥에 널려있었다. 마산시청 유리창은 전부 박살이 나있었고,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경찰의 삼엄한 경비속에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호송되고 있었다. 머리에 피가 맺힌 붕대를 감은 학생도 보였다.

4월11일 실종된 김주열 시신이 참혹하게 살해되어 마산 앞 바다에서 발견되고, 격분한 시민과 학생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애국가'' 전우야 잘 자라'등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하던 모습, 전투복을 입은 경찰들의 모습이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는 그저 신기해 보였고 재미있어 보였다. 먼훗날 철이 들 무렵 그것이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3.15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을...

그때의 고등학생 모습은 나에게는 너무나 큰 산 처럼 보였다. 의거가 일어난지 반세기가 지났다. 당시의 세대들은 70대를 넘은 인생의 석양길에 서 있는 세대가 되었다.

.

 

 

역사적 의의:

 

 

●3.15항쟁은 기본적으로 마산인이 가진 진취성과 식민지 시기 이래 형성된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성을 바탕으로 하여 독재정권에 대항한 민중항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사회에 민주화 운동으로서의 민중항쟁의 효시가 된 역사적 사건이 바로 마산의 3.15항쟁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960년 1970년대를 거치면서 독재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운동으로 정착되었다.이제 분명한 것은 자유 정의 앞에 어떠한 불의와 독재도 존재할 수 없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으며 또한 역사는 그것을 분명히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장기 집권 유지를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하자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이에 항거하여 시위를 일으켰다. 1차 의거에 이어, 4월 11일 그 동안 행방불명 되었던 김주열 군이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의 시체로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르자 격분한 시민들 이 다시 2차 의거를 일으켜 피흘리며 싸웠습니다. 이 항쟁에서 12명이 사망하고 700여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거나 체포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이러한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자연발생적이고 의로운 투쟁에 대한 경찰당국의 가혹한 탄압은 전 국민들로 하여금 슬픔과 분노를 불러 일으키게 했다. 그리하여 이는 곧 "부정선거 다시 하라". "구속된 마산 학생 석방하라"는 구호와 함께 4 ·19혁명으로 이어져, 드디어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민권이 승리하게 되었다. 자유 · 민주 · 정의가 기본 정신인 3 · 15마산의거는 현대사에 있어 최초의 민주 ·민족운동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으며 또한 현대사 민족운동의 발판이 되었다.

 

▲1960년3월15일 가장 치열했던 투쟁현장에 세워진 3.15의거 기념탑(마산합포구 서성동)

탑문:"저마다 뜨거운 가슴으로 민주의 깃발을 올리던 그날 1960년 3월15일! 더러는 독재의 총알에 꽃 이슬 되고 더러는 불구의 몸이 되었으니 우리들은 다하여 싸웠고 또한 싸워서 이겼다! 보라 우리 모두 손잡고 외치던 의거의 거리에 우뚝 솟은 마산의 얼을! 이 고장 3월에 빛발친 자유와 민권의 존엄이 여기 영글었도다."


▲3.15의거 발원지(마산 창동 불종거리에서 오동동 사거리 사이 문화의 거리에 새겨넣은 동판)

마산의 중심지로서 당시 이곳에 야당인 민주당사가 있었다. 부정선거에 항거하기위한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수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일부는 북마산 파출소로 일부는 남성동 파출소와 마산시청으로 향하면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하게 된다.



▲마산합포구 상남동 성남교(북마산 가구거리 입구) 부근에 있는 3.15의거 기념비

1960년 3월15일 밤 가장 격렬했던 의거 현장인 북마산파출소 주변에 있었으나 도로확장으로 인해 파출소는 없어지고 기념비는 현 위치로 이전 되었다.

비문:"한조각의 돌을 길가에 세워 의로운 역사를 새겨 두노니 이는 길이 빛날 것이다. 시민들의 노함은 막기 어려우며 뜨겁게 흘린피는 역사에 남으리라. 나라를 다스리는 위정자들은 이를 어찌 본받지 않을 수 있으리"



▲시청으로 향하던 시민들이 교문앞에서 대치중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9발의 총탄 자국이 있는 무학초등학교 담장. 50여년의 세월이 흘러 담장이 부식되어 덧칠을 하여 총알자국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무학초등학교 정문과 담장 신축으로 인해 철거해야할 운명에 처했으나, 역사현장 복원 단체에서 공사중지 요청으로 이 부분은 그대로 남이있다.


▲3.15 의거 시위중 경찰 발포로 숨진 강융기 추도비(마산공업고등학교 내)


▲3.15의거 시위중 경찰 발포로 숨진 김용실, 김영준 추념비(마산고등학교 내)


▲3.15의거 시위중 사망한 김주열 추모비(마산용마고등학교 내)




▲김주열 시신 인양지(마산 중앙부두 해변. 신포동 대한통운 사옥이 있는 해안가)

1960년 4월11일 중앙부두 앞 바다 수면위로 10대로 보이는 소년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로 떠오른다. 시체는 당시 마산도립병원(현 경상대학교 마산의료원)으로 옮겨졌다. 참혹한 모습을 확인한 13만 시민들은 격분하여 4월12일 대규모 마산 2차의거를 일으키게 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참혹한 어린 학생의 모습이 전파를 타자 4월18일 서울 고려대학교의 시위에 이어 4월19일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전국의 각 대학교및 고등학생과 시민들이 데모를 하게 된다. 4월19일 서울에서만 경찰의 발포로 18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이 노래는 마산시민들 에게 크게 유행되었으나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고 잊혀져 갔다. 김주열은 마산상업고등학교(현 마산용마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개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의 시신은 그의 고향인 남원에 안장 되었고 현 3.15민주 묘지에는 그의 유품으로 안장한 가묘가 있다.

▲남원땅에 잠 들었네 노래 동영상

▲4.19혁명의 진원지(당시 마산도립병원, 현 경상대학교 마산의료원)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된 이곳에서 분개한 마산시민의 데모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비문:"1960년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이 곳에서 가장 치열하게 항쟁이 전개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의로운 마산시민의 투쟁정신은 곧 4.19혁명 승리의 시발점이 되었다."


▲국립3.15민주묘지(마산시 구암동 애기봉 산자락)

마산3.15의거와 4.19혁명때 사망한 사람과 고문및 부상으로 인한 휴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이 안장 되어있다.




▲ 국립3.15민주묘지 추모 조형물

 

▲국립3.15민주묘지 내에 있는 추모시비 앞의 조형물

▲피지도 못하고 떨어진 꽃다운 청춘(국립3.15민주묘지 내)

▼마산 3.15마산 의거 사진. 시위현장 외 경찰의 발포로 사망한 학생들의 참혹한 사진은 올리지 않았습니다.








▼서울의 4.19혁명 사진






[출처] 마산의 魂(마산 3.15의거 역사 탐방)|작성자 수석

 

 

 

출처바로가기 http://blog.naver.com/haneuigu/10150318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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