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왕모, 길의 점묘화
고속도로를 달리는 짐차들 비에 녹슬어
허물어진 빈자리로
짐들이 빠져나간다
빠져나온 것들이 뒤차의 바퀴에 눌려
길바닥과 한 몸이 돼간다
고속도로엔
깔려 죽은 짐승들
살은 썩고 뼈는 부서져 바람에 날아가고
눌어붙은 핏자국은
지나는 차들의 그림자보다 흐려지고
박남준, 나도야 물들어간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대의 곤한 날개 여기 잠시 쉬어요
흔들렸으나 흔들리지 않은 목소리로
작은 풀잎이 속삭였다
어쩌면 고추잠자리는 그 한마디에
온통 몸이 붉게 달아올랐는지 모른다
사랑은 쉬지 않고 닮아가는 것
동그랗게 동그랗게 모나지 않는 것
안으로 안으로 깊어지는 것
그리하여 가득 채웠으나 고집하지 않고
저를 고요히 비워내는 것
아낌없는 것
당신을 향해 뜨거워진다는 것이다
작은 씨앗 하나가 자라 허공을 당겨 나아가듯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여간다는 것
맨 처음 씨앗의 그 간절한 첫 마음처럼
박남희, 테두리로 본다는 것
그는 알이 없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본다
멋을 위한 것일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희뿌연 달무리가 떠오른다
달에게 달무리는 왜 필요할까를 생각해보면
안경 테두리의 효용을 이해할 수 있다
테두리로 본다는 것
눈과 세상 사이가 너무 황홀해
그 사이에 유리는 빼고 그냥 테두리로
세상을 보고 눈을 본다는 것
그냥 맨눈으로 보는 것이 너무 죄송해서
테두리로 보는 것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다
눈부신 세상을 바라볼 때
까만 테두리가 있어 세상이 또렷이 보이는
그런 당위성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테두리로 본다는 것
그것에는 왜 유리가 없느냐고 나무랄 수 없는
유한의 광활한 바깥이 있어
달보다 달무리가 아름다운 것이라고
토성이 천왕성을 보듯
그는 알이 없는 안경을 끼고 세상의 바깥을 본다
임성숙, 산길
어느 누구도 녹녹한 사람 없다더니
어느 산도 만만한 산은 없다
헉헉 오르막길과 아슬아슬 내리막길
험준한 그 산길
올라갈 땐 오르막길이
되돌아서 내려올 땐 내리막길인 것을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는
산길인 것을
김나영, 극빈
시 쓰는 내게 책상 하나 없다
나는 바닥에, 거리에, 꽃잎 위에 엎드려 시를 쓴다
머리 속 상(像)을 접으니
세상에 널린 게 책이고 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