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건, 빛나는 것들은
빛나는 것들은 버려진 뒤편에 있다
팥이며 동부 콩 등속이 낱알 튕기고 떠난
하얀 몸피의 껍질들이며
알곡을 내준 모든 것들이
들녘이나 길바닥에 처박혀
아침 서리 속에 반짝 빛나고 있다
영글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껍데기들
빛나는 것은 언제나
눈이 머물지 않는 곳이나
떠난 가을처럼
버려진 뒤편에 있다
정호승, 부활
진달래 핀
어느 봄날에
돌멩이 하나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돌멩이가 처음에는
참새 한 마리 가쁜 숨을 쉬듯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더니
차차 시간이 자나자 잠이라도 든 듯
고른 숨을 내쉬었다
내가 봄 햇살을 맞으며
엄마 품에 안겨
숨을 쉬듯이
오한욱, 호흡
나무들이 호흡을 고르자
산이 이내 안개에 휩싸인다
줄기와 줄기의 몸짓이 잎의 떨림으로 입맞춤하는 사이
계절은 늘 때맞추어 산에 몸을 비벼댄다
이제야 돌려보는 숨, 생각건대
때론 들숨과 날숨을 맞추어나가는 일이 필요한 듯
당신과 나 사이에도
이운진, 갑사 가는 길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는다면
그래서 한 자리에 오래 서 있어야 한다면
거기, 서 있고 싶네
일주문 넘어가는 바람처럼
풍경소리에 걸음 멈추고
그곳에서 길을 잃고 싶네
산그늘 물소리 깊어져서
늙고 오래된 나무 꽃이 지고
꽃 피운 흔적도 지고 나면
말까지 다 지우는 마음처럼
수만 개의 내 꿈들 떨구어 내는 일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저, 먼 길 끝나지 않았으면
신영배, 물로 투명해지기
아침에 새와 함께 깰 때
귀가 있는 듯 없는 듯하기
차를 마실 때
입술이 있는 듯 없는 듯하기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을 때
등이 있는 듯 없는 듯하기
복도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갈 때
다리가 있는 듯 없는 듯하기
병실로 들어섰을 때
흰 살결이 있는 듯 없는 듯하기
바다 쪽으로 쳐둔 커튼을 젖힐 때
두 팔이 있는 듯 없는 듯하기
이제 바다로 갔을 때
눈물이 있는 듯 없는 듯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