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연필로 생(生)을 쓴다
밤중에 홀로 앉아 연필을 깎으면
숲의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다
사박 사박 연필로 글을 써 내려가면
수억 년 어둠 속에 묻힌 나무의 숨결이
흰 종이 검은 글자에 자욱하다
연필로 쓰는 글씨야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지만
내 인생의 발자국은 다시는 고쳐 쓸 수 없어라
그래도 쓰고 지우고 다시 고쳐 쓰는 건
오늘 아침만은 견결한 걸음으로 걷고 싶기 때문
검푸른 나무향기 가득한 이 밤에
박후기, 라면을 끓이며
라면을 끓인다
천변 평상 위에 걸터앉아
냄비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마음을 끓인다
뜨거운 국물에
입을 댄다 기어이
입을 덴다
국물도 없는 팍팍한 세상
냄비 바닥을 뒤지며
해물 건더기나 건지고 있는
볼품없는 나무젓가락도 한때
푸른 잎을 매달고
바람을 휘어잡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돌 틈 사이로
물 흐르듯 여름이 지나가고
쓰다 만 열망이
어딘가 남아 있을 거라고
붉게 물든 개옻나무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마흔 살
평상 위에 놓인 책이 말하는 것은
아직은 나의 미래에 관한 것
내게 필요한 것은
끝없는 인내와 약간의 운
그리고 청춘의 부재를 설명해 줄
그럴듯한 알리바이 한 소절
윤문자, 나이테
아~먹어도 배가 고팠다
허리띠를 졸라 맸다
졸라맨 허리띠를
풀 수가 없었다
먼저 찬 허리띠는
안으로 들어가고
또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플 때마다
허리띠를 둘러찬
통나무를 본 적이 있었다
박남준, 놀라워라
낙엽 하나 땅에 떨어졌다
어떤 나비의 애벌레에 몸을 내주었나
삭은 뼈처럼 드러난 잎맥들 방울방울
이슬을 매달아 햇빛을 굴린다
그 모습 열반한 선승의 사리 아닌가 생각하는데
몸의 어느 구석에 생기가 남아 있었던가
가을볕에 뒤척이다 발끝부터 토르르~륵
동그랗게 말았다 번데기 같다
가지에서 떨어져 허공을 부유하다
나비를 꿈꾸었는가
놀라워라 저 낙엽
임영석, 받아쓰기
내가 아무리 받아쓰기를 잘해도
그것은 상식의 선을 넘지 않는다
백일홍을 받아쓴다고
백일홍 꽃을 다 받아쓰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받아쓴다고
사랑을 모두 받아쓰는 것은 아니다
받아쓴다는 것은
말을 그대로 따라 쓰는 것일 뿐
나는 말의 참뜻을 받아쓰지 못한다
나무며 풀, 꽃들이 받아쓰는 햇빛의 말
각각 다르게 받아써도
저마다 똑같은 말만 받아쓰고 있다
만일, 선생님이 똑같은 말을 불러주고
아이들이 각각 다른 말을 받아쓴다면
선생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햇빛의 참말을 받아쓰는 나무며 풀, 꽃들을 보며
나이 오십에 나도 받아쓰기 공부를 다시 한다
환히 들여다보이는 말 말고
받침 하나 넣고 빼는 말 말고
모과나무가 받아 쓴 모과 향처럼
살구나무가 받아 쓴 살구 맛처럼
그런 말을 배워 받아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