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긴 호흡
직선으로 달려가지 말아라
극단으로 달려가지 말아라
사람의 길은 좌우로 굽이치며 흘러간다
지금 흐름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꾼 때
머지않아 맞은편으로 흐름이 바뀌리라
너무 불안하지도 말고 강퍅하지도 마라
오른쪽이건 왼쪽이건 방향을 바꿀 때
그 포용의 각도가 넓어야 하리니
힘찬 강물이 굽이쳐 방향을 바꿀 때는
강폭도 모래사장도 넓은 품이 되느니
시대 흐름이 격변할 때
그대 마음의 완장을 차지 마라
더 유장하고 깊어진 품으로
새 흐름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라
삶도 역사도 긴 호흡이다
서하, 산길을 걸으며
사람들이 산 속을 걷고 있다
아니, 산이 사람 속으로 걷고 있다
두고 오려던 그림자는 악착같이 따라붙고
어디로든 흐르지 못한 마음들
산 아래서 쫓던 욕심들 내려놓으면
저 햇살처럼 가벼울 수 있을까
돌탑 앞에서 쉼표처럼 앉아 쉬다
몸 한 그루 일으키려 힘주는데
투두둑 세월이 타진다
민망한 듯 얼굴 붉히는 한낮
그늘과 햇살, 햇살과 그늘
한 땀 한 땀 꿰매는 실바람도
나뭇잎 같은 길속으로
촘촘히 걷고 있다
최정란, 접선
깜박, 깜박
공중에서 모스부호가 만난다
마주 보는 아파트 불 꺼진 앞, 뒤 베란다
담뱃불, 빛을 전송하는 두 남자
오늘도 별 일 없었느냐고
말 없는 안부가 공중을 오고 가지만
주차장에서 날마다 스쳐도
누구인지 서로를 알지 못한다
삶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
선으로 연결되어 그물고처럼 당겨지는
조직에
한 점으로 심겨진 스파이들
깊은 밤 같은 시간 깨어있는 담배 하나로
잠든 가족에게 보여주지 못한 어둠
구름으로 날려보낸다
필터로 다 걸러내지 못한 한 개비의
남자라는 기호
외로움의 코드로 해독되지 않는 난수표
장승진, 그리운 오늘
불러 보았어 내 안으로
니가 아직 거기 있는지
귀를 막고 귀 기울였어
너의 시냇물 같은 사랑에
사랑의 밑바닥에 뿌리내린
내 마음은 물풀과 같아
고기 몇 마리쯤 뜯어먹어도
금방 또 자라나지
정경란, 손님
뭘 이렇게 많이 들고 오셨어요
편하게 앉으세요
잘 훈육된 아이처럼
허락 없이 아무것도 만지지 않는 당신
이것저것 물어봐도
글쎄다 하는 한 마디로
마음을 꼭꼭 여미시는 당신
졸음이 와도
어느 방에 들라는 말이 있을 때까지
애써 피곤을 참는 당신
겨우 하룻밤 묵어가면서도
크나큰 실례를 범한 듯
아니다 괜찮다로 일관하시는 당신
호미와 낫 한 자루로
그 넓은 들판을 호령하던 기개 어디다 두고
한쪽 벽에 기대 새우잠을 청하는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