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현, 김종삼 약국
잊을 만하면
빗방울 같은 두통이
머릿속 후미진
주소불명의 동네를 찾아온다
커피집과 꽃집 사이에 끼어 있는
음반가게와 족발집 건너편에 있는
약국은 항상 미로 끝에 있다
벙거지 쓴 약사 선생은
손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당신이 찾아올 줄 알았다는 눈길로
진단하고 건성으로 처방했다
당신의 영혼도 뻥 뚫렸군요
두통 사이에 낀 음악과
음악 사이를 적시는 빗방울
몇 봉지 받아들고 돌아서는
처음 가보는 낯선 동네의 저녁이다
박제천, 여름바다의 비밀
일찍이 나는 바다 아래 남모를
사원(寺院)을 한 채 숨겨 놓았다
그리운 바다여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에서
그대를 가끔 만난다
그대가 썰물이 되어 지나가 버린 자리마다
사람들의 서글픔이 갯벌로 나타나고
그대가 어디선가
밀물처럼 몰려오는 소리가
사람들의 기침소리 속에 들려온다
나는 언제 바다를 잊고 말았는가
바닷가재 회를 먹으러
제주도를 찾아가 볼까
바닷가재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서해와 동해와 남해의 바다를 샅샅이 훑어볼까
믿음은 참으로 덧없구나
그리움은 속절없이 병이 되었구나
사원(寺院)은 바다 아래 모래알처럼 멀기만 하구나
황영선, 바다가 그리운 간이역
이 간이역에 내리면
아름다운 간이역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산다는 것은 저무는 것
일몰의 저녁이 오면
함께 저물어도 좋을 그리운 그 사람을 기다리다가
막차가 끊기면
어느 지붕 낮은 민박집에 엎드려
파도소리에 잠을 설쳐도 나는 행복하겠네
바다가 그리운 날 기차를 타고 가다
쓸쓸한 발자국을 내려놓기 좋은 간이역을 만나면
그 이름 묻지 않아도 나는 알겠네
기차가 사라지고 나면 이내 다시 적막해지는
그리운 간이역
구부러진 골목길을 마중 나오는 파도소리를 따라
길을 열던 송정, 송정역 같은
양문규, 늙은 식사
숭숭 구멍 뚫린 외양간에서
늙은 소 한 마리 여물을 먹는다
인적 드문 마을의 슬픈 전설
허물어진 담장 위에서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내린다
한낮의 논배미 출렁이는 산그림자를
되새김질하듯 물 한 대접 없이
우직우직 여물을 먹는다
어두워지는 때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그리움을 찾아 나선다는 것
따순 햇살 흠뻑 먹은 들녘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싶은
우리 아버지 뜨뜻한 아랫목에서
벌겋게 밥 비벼 먹는다
박노해, 길이 끝나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