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수, 내리막의 힘
고물 프라이드, 달리던 차 엔진이 끝내 천천히 꺼져버린다
다행히 아주 미미하게 경사가 져 있는 데여서
고가도로 그늘 아래 널찍한 공간으로 차를 몰아넣을 수 있었다
핸드브레이크를 당겨 차를 세웠다
네 바퀴가 길바닥을 꽉 잡고 버틴다. 시꺼먼 아스팔트가 그녀에겐 지금
단단한 늪이다. 퍼져 난감한 프라이드 옆을
프라이드를 뒤덮은 고가도로 위를
마음껏 달리는 차들의 진동 때문에
그녀의 프라이드는, 끊임없는 파문에 떠밀리는 마른 연잎 같다. 이 연애의 끝자리
그녀가 안전벨트를 맨 채 울먹거릴 때
어여쁜 귀고리가 달랑대며 한사코 그녀를 지킨다. 하지만
구겨진 이 프라이드는 이제 폐차될 것 같다. 견인차가 도착하고
핸드브레이크를 풀자 움찔, 저를 푸는
이 프라이드는 또 무엇인가
내리막엔 다시 한 번 박차를 가하고 싶은 힘이 있다
오두섭, 시간은
제 스스로 흐르지 않지
그냥 있는 것이지
걸어가기가 귀찮은 것이지
흘러가는 것 강물이지
달려가는 것 바람이지
저들의 길을 따라 도는 것은
별자리들이지 그리움들이지
새들이지 물고기지 짐승들이지
무지개는 언제나 문을 다 열지 않고
어떤 사람들처럼 시간은 가끔
뛰어가기도 하는 것이지
우리가 어디에 홀려 있을 때
평소에는 그 자리 그냥 서 있는 것이지
그러니 시간을 내어
서랍을 괜히 한 번씩 열어 보지 마라
그 안에 그냥 누워 있는 보석도
보여지기 싫은 것이지
숨쉬기 싫은 것이지
우리에게 추억이 있는 것은
시간의 몸에 대못을 박았기 때문이지
황영선, 옛 편지를 읽는 저녁
비내리는 분황사 뜰에
막 핀 배롱나무 꽃 송이들이
제 몸의 꽃빛을 풀어
시를 쓰고 있었지
받아적기도 전에 지워지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본 일 말고는
이 저녁 한 일이 아무것도 없지만
가슴에 물기처럼 번지는 그것이 시가 아니었을까
귀열고 문 열어두어도
나는 아직 캄캄한데
한 몸인 듯 편안해진 모습으로
어둠과 빛의 경계를 허물고 있던 풍경소리
백 년도 못 견딜 생애
쓸쓸한 저녁이 찾아오면
흐린 불빛에 기대어 시를 읽다 잠이 들겠네
못다 읽은 시편들은 가슴으로 읽으리
이해리, 양장본
펼처놓은 페이지가
고정되지 않는군요
손바닥 힘주어 문질러 놓으면 잠시
손 떼면 이내 후루룩
내면을 감추어 버리는군요
희고 단단하고 지적인 당신
참 성가시군요
더 감질나고 더 목마르게 하는군요
생은 튕겨야 맛이라 하려는 건가요
쉽게 속을 보이면 싸구려라 하려는 건가요
시간이 흐를수록 완강해지는 당신
내 팔이 아파오는군요
너무 튕기면, 당신
읽지 않는 수가 있습니다
영영 덮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서규정, 만추 단추
믿을 건 오로지 외로움뿐이라 강은 외줄기로 흐르는가
감물 든 런닝구 같은 백사장을 늘어지게 붙들고 붙들던
그 사랑이 물이 되어 돌돌돌 저리 여울지는지 몰라
심장에 빨대를 찔러 넣듯
고부라진 모습을 누가 또 눈여겨 볼까마는
마른 잎 한 잎 내려놓고도 하늘은 끝 간데 없이 들리고 들려
눈썹 끝으로 몰려나온 두 줄기 눈물이 그렁그렁
천리나 만리 밖으로 흐르는 강물과 셋이서 함께 흐르라
이제 더는 외롭지 않게 여럿이서 가라 했네
그대, 메이고 메인 가슴 멍 자리는
허수아비 옷깃을 다져 여며 단추로 달아놓고
심장에 곶은 빨대를 쪽쪽 빨며 불불불 따라가도 천리이고
거슬러 와도 만리인, 내 마음 저녁 강에 빈 배로 떠돌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