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규정, 저 바람 한 번 만져보려고
팽팽하게 당겨져 살고, 팽팽하게 박혀서 죽을 저 과녁을
마지막 화살로 이해해 가야 한다
겨냥, 사는 게 구질구질해선 안 돼
명중, 파르르 꼬리 떨리는 미세한 울분이라도 참아야 돼
사수가 쏘아 맞추는 것은 발등뿐
발사의 사거리가 짧다
아니다 너무 길다
저 바람 한번 만져보려고 제 눈을 제가 찌르고 난 뒤의
사랑, 이거
김광균, 추일서정(秋日抒情)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 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이기철, 가을이라는 물질
가을은 서늘한 물질이라는 생각이 나를 끌고 나무 나라로 들어 간다
잎들에는 광물냄새가 난다
나뭇잎은 나무의 영혼이 담긴 접시다
접시들이 깨지지 않고 반짝이는 것은
나무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햇빛이 금속처럼 내 몸을 만질 때 가을은 물질이 된다
나는 이 물질을 찍어 편지 쓴다
촉촉이 편지 쓰는 물질의 승화는 손의 계보에 편입된다
내 기다림은 붉거나 푸르다
내 발등 위에 광물질의 나뭇잎이 내려왔다는 기억만으로도
나는 한 해를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오만한 기억은 내 발자국을 어지럽힌다
낙엽은 가을이라는 물질위에 쓴
나무의 유서다
나는 내 가을 시 한 편을 낙엽의 무덤위에 놓아두고
흙 종이에 발자국을 찍으며 돌아온다
고두현, 거룩한 구멍
한 입이
밤을 먹고
말을 뱉고
혀를 놀려
죄 짓는 동안
또 한 입이
밥을 삭이고
말을 거두고
혀를 오므려
용서를 비는구나
정끝별, 추파, 춥스
흘러내리는 네 눈의 윙크
흘러내리는 네 어깨의 머리카락
가을강물을 흔드는 바람아 끈적끈적하잖니
흘러드는 내 귀의 노래
흘러드는 내 손가락 사이의 설탕물
끈적끈적 채웠으니 시절아, 따라갈까 붙어갈까
저 입이 움켜쥔 군침
밀크와 딸기가 섞인 백 개의 강이 흐르고
채워지지 않는 입은 저 둥근 허공을 쭉쭉 빨고있는데
화공(畵工)은 어딜 갔다니
달콤한 혀로 천 개의 침을 찍어
노는 물결 위에 한 생으로 그리고 그려야 하는데
오, 살랑대는 추파(秋波)
춥스! 이제 곧 앙상한 겨울 막대만 남을 텐데
가까스로 가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