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도, 물
유려한 흐름
막히면 넘치고
새어나가는
내 손에는 잡히지 않는 것
여리고 투명한 물빛
그대 선한 눈동자
마음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그 실체
사람의 마음 같아야
공광규, 늙어가는 함바집
멈춘 시계가 5시 53분을 가리키고 있는 저녁
폐자재가 굴러다니는 강변 목련나무 아래 함바집은
판자를 덧댄 문을 헌 입처럼 가끔 벌려서
개나리나무에 음표를 매달고 있습니다
멀리서 기차는 시간을 토막 내며 철교를 지나고
술병을 세운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얼굴에 팬 주름을 악기처럼 연주하며
뽕짝으로 지르박으로 늙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없는 날에도 기차는 녹슨 철교 위에서
여전히 시간을 토막 내며 지나고
자동차는 요란한 청춘처럼 잘못 살고 있는 중년처럼
속도를 몸을 위반하며 지날 것입니다
강물은 길이를 잴 수 없을 만큼 흘러가고
풀잎은 수없이 시들고 또 새 풀잎을 낼 것입니다
사랑도 몸도 연꽃처럼 시들고 구겨지고
전등은 여전히 인생을 측은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우리가 없는 날에도 목련나무 아래 함바집
녹슨 난로 옆엔 사람들이 따뜻하게 늙어갈 것입니다
종교처럼 늙어가는 술집의 멈춘 시계는
여전히 저녁 5시 53분을 가리키고 있겠지요
문정희, 내가 화살이라면
내가 화살이라면
오직 과녁을 향해
허공을 날고 있는 화살이기를
일찍이 시위를 떠났지만
전율의 순간이 오기 직전
과녁의 키는 더 높이 자라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팽팽한 허공 한가운데를
눈부시게 날고 있음이 전부이기를
금빛 별을 품은 화살촉을 달고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고독의 혈관으로
불꽃을 뚫는 장미이기를
숨쉬는 한 떨기 육신이기를
길을 알고 가는 이 아무도 없는 길
길을 잃은 자만이 찾을 수 있는
그 길을 지금 날고 있기를
서규정, 막춤
바람이 불면 금방 쓰러질 가느다란 기둥들
이슬비는 풀잎을 먹고 자란다
생은 앞을 미리 닦아놓거나, 뒤를 훔치지는 않듯이
깃발은 허공의 걸레가 될 땐 되더라도
나부끼는 만큼 부대낀다는 거
마냥 하염없다는 것
스러질 한순간을 위해 바람을 갈가리 찢으며 춤출 때
맨 바닥에서 누구의 깃대인 줄도 모르고
먼 지진을 부르며
덩실덩실 덩달아 춤추고 있는 나여 나, 그리고 너
정끝별, 묵묵부답
죽을 때 죽는다는 걸 알 수 있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거야?
죽을 때 모습 그대로 죽는 거야?
죽어서도 엄마는 내 엄마야?
때를 가늠하는 나무의 말로
여섯 살 딸이 묻다가 울었다
입맞춤이 싫증나도 사랑은 사랑일까
반성하지 않는 죄도 죄일까
깨지 않아도 아침은 아침일까
나는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흐름을 가늠하는 물의 말로
마흔 넷의 나는 시에게 묻곤 했다
덜 망가진 채로 가고 싶다
더 이상 빚도 없고 이자도 없다
죽어서야 기억되는 법이다
이젠 너희들이 나를 사는 거다
어둠을 가늠하는 속깊은 흙의 말로
여든 다섯에 아버지는 그리 묻히셨다
바닥을 향해 피는 상수리꽃을 마주하여
젖은 물살을 저어가는 지느러미뼈를 마주하여
흙에서 깨어나는 달팽이 촉수를 마주하여
고스란히 제 짐 지고 제 집에 들어앉듯
다문 입술에 맺힌 말간 물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