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섭,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버짐이 핀다
언제나 이맘때 버스정거장
초가을 따가운 햇살 받으며
나무들 오래전부터 여기 서있고
그런데 서 있는 사람들의 간격으로 서 있고
이윽고 저 사람 걸어온다
본당 성체 행렬에서 지나치는 사이
쭈볏쭈볏 목례 평화의 인사도 못 나눈 사이
그쯤에서 걸음을 멈춘다
10미터 간격쯤 그 중간에서
백반증 플라타너스 한 그루
저 사람과 이 사람을 가려주고 있다
고마워서 힐끔
눈알만 왼쪽으로 돌려 보니
저 사람의 나온 배가 조금 보인다
이 사람도 반 걸음쯤 슬쩍 뒷걸음이다
두 시선이 만나는 곳에서 마른 버짐이 핀다
버스는 어서 오지 않고
진순분, 따스한 꽃
어둠과 화해하고
고통과 악수를 하면
모진 풍파 견딘 벼랑에
온 몸 부서지는 파도도
수없이
지고 피는 꽃
돌아보면
다 꽃입니다
권갑하, 인사동에서
생은
슬픔의 서랍에 손때를 먹이는 일
해지고
벗겨지고
금이 가고
깨지고
얼룩도
향기도 없는
한 생이
찻잔 속에 어린다
이운진, 슬픔의 애인
나는 너무 오래 슬픔과 사귀었다네
헛되고 아름다운 것들 속에는 슬픔이 많아
나를 부르는 깊은 숨소리에 자주 덧나고 말았네
슬픔을 바라보면 모든 열망이 무릎을 끓고
슬픔 속의 괴이한 평화로움은
처음 가진 방처럼 깊고 아늑하였네
울음의 두께로 상처의 깊이를 헤아려주는
슬픔은 참으로 다정하여서
흐느낌의 기억을 가진 삶은 위로받았고
청춘은 쉽게 요절을 꿈꾸었네
뜻밖에도 온전히 살고 싶은 그런 봄날조차
몸의 생즙 같은 울음을 쏟아놓으면
또 다시 슬픔을 수혈받았네
내게 슬픔만큼 당차고 충직한 애인은 없었네
문정희, 오십 세
나이 오십은 콩떡이다
말랑하고 구수하고 정겹지만
누구도 선뜻 손을 내밀지 않는
화려한 뷔페상 위의 콩떡이다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내가 콩떡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 죄는 아니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시간은 안 가고 나이만 왔다
엉큼한 도둑에게 큰 것 하날 잃은 것 같다
하여간 텅 빈 이 평야에
이제 무슨 씨를 뿌릴 것인가
진종일 돌아다녀도 개들조차 슬슬 피해가는
이것은 나이가 아니라 초가을이다
잘하면 곁에는 부모도 있고 자식도 있어
가장 완벽한 나이라고 어떤이는 말하지만
꽃병에는 가쁜 숨을 할딱이며
반쯤 상처 입은 꽃 몇 송이 꽂혀 있다
두려울 건 없지만 쓸쓸한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