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기, 물이 나간 자리
비우는 것이란 저런 것이다
날물이 나간
빈자리
허공에
흰 눈
몇 점 걸어놓은 이른 저녁
부둣가 실비집
취해 반쯤 기우뚱한 내가 서 있다
바람에 불려온
빈 비닐봉지마냥
떠밀려온 내가 있을 뿐
나조차 내가 낯설다
지나가는 새소리인가
내리는 흰 눈 속에
새까맣게 눈을 뜬 갈매기가
깃을 묻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이미산, 미모사
기억된다는 것
열 손가락 동시에 폈다 오므리는 것
우연히 살아나는 미세한 진동 같은 것
충만으로 달려가는 귀향 같은 것
마음 둘둘 에워싸는 철부지 풍경 같은 것
책의 행간에 누워있는 오래된 애인처럼
꽃무늬 몸빼 바지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한 눈길처럼
내 안의 깊은 숲속
종일 햇빛 쪽으로 따라 도는
기억된다는 것
안녕, 누군가 손끝 살짝 건드려 준다면
화르르 삭은 뼈로 깨어나는 눈 먼 기다림 같은 것
손택수, 빛의 감옥
가로등 어디에 틈이 있어
날벌레들이 그 속을 파고드는 모양이다
입구를 잃어버린 날벌레 한 마리가
램프를 감싼 유리등을 두드리고 있다
유리벽에 머리를 짓찧고 있다
저 환한 무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얼마나 파닥거리며 왔던가
무덤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지 않기 위하여
발버둥 쳤던가
비명으로 꽉 찬 유리 속에 간신히
둥지를 튼다
이삿짐을 풀고 내다보는 거리
가로등이 거리를 밝히는 대신 감추고 있는
유리알 속에 아침마다 눈곱이 낀다
신정숙, 외발
신발 한 짝
길 끝에 버려져 있다
긁히고 넘어진 외발의
버거운 삶을 벗어놓은 것일까
신발 안이 조용하다
뛰거나
걷거나
발자국만 다른
바람이 와서 끼워본다
허둥지둥 달려온
길 뒤축이 닳아 있다
이영주, 고양이가 걸어간다
네가 너무 멀어서 나는 벽 뒤로 돌아간다
내 문장은 벽 뒤에서 시작되고
나는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교환원처럼
너에게 끈질긴 인사를 한다
얼마나 울었으면 등뒤를 깎아버렸을까
벼랑 속을 들여다보면 현기증이 난다
모든 죄는 눈빛에서 시작되었다
각자의 등짐 속에서 벼룩을 잡고 있는
그대의 울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누군가 비가 되지 못한 구름의 기억처럼
나를 자꾸만 부른다면
이 세상 밖으로 빨리 달리는 다리가 되고 싶은 밤
수화기를 들고 걷는다
네가 버리지 못한 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갈 자세로
외로운 자의 얼굴은 점점 길어진다
통곡이 쏟아지는 장마철에는
벽 뒤에 침묵을 새겨놓고 걷는다
등뼈가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