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베를린에 온지 벌써 2년 반이 흘렀다. 처음 베를린에 왔을 때 내 머리 속은 독일어를 어떻게 정복하고 대학원에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시아인들로 가득 찬 캐나다 영어어학원과는 달리 독일어 어학원의 경우 인근 유럽에서 온 친구들이 대다수였다. 그 중에 눈에 띄는 점은 스페인에서 온 친구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었다. 경제위기 때문이었을까. 독일에서 안정적 생활을 누리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대다수였다. 하긴 스페인의 실질청년실업률이 50% 가까이 되니,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우리나라 청년들이 실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베를린에서 스페인 친구들을 통해 보는 것 같았다.
카탈루냐는 어떤 곳? |
카탈루냐는 스페인 북동부 지역으로 바르셀로나·헤로나·레리다·타라고나를 포함하고 있다. 4700만 스페인 인구 가운데 16% 정도인 750만이 거주하는 카탈루냐 지역은 면적이 스페인 전체의 10%에 불과하지만, 첨단 산업과 높은 농업생산력 덕분에 스페인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연간 지역내총생산(GRDP)의 9%(약 170억 유로)가량이 중앙정부를 통해 남부 안달루시아 등 지방정부를 돕는 데 사용돼 지역 주민의 불만이 크다. 2012년 11월 초 안달루시아가 중앙정부에 49억 유로(약 6조 9200억 원)에 이르는 구제 금융을 신청하자 카탈루냐 지방정부도 경제위기로 부채가 많아져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더욱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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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어학원 상급반으로 진급했을 때도 역시 스페인에서 온 친구들이 대다수였다. 특히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온 친구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 지금까지 연락을 하는 라이아라는 친구가 있다. 라이아는 현재 카탈루냐 신문에 기사를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이 친구도 역시 카탈루냐의 경제상황으로 인해 독일로 오게 됐다. 그녀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첫 번째가 이들의 모국어가 스페인어가 아닌 카탈루냐어라는 것, 두 번째가 카탈루냐가 독립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카탈루냐어가 스페인어 방언쯤으로 생각했었는데, 그녀는 카탈루냐어는 스페인어랑 다른 점이 많다고 항상 강조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원하는 독립은 무엇일까? 기자인 라이아에게 혹시 관련 뉴스거리가 없냐고 전화를 했다가 마침 카탈루냐의 유명한 석학이 베를린을 방문해 카탈루냐 독립문제에 대한 일일 세미나를 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카탈루냐 석학 테리카브라스 교수를 만나다 |
▲ 23일 열린 세미나 모습. 왼쪽이 카탈루냐의 요셉 마리아 테리카브라스 교수이고 오르쪽이 카탈루냐 정부를 대표해 나온 마르티 에스투르크 악스막허씨다. |
ⓒ 최서우 | 관련사진보기 |
지난 23일 열린 카탈루냐 독립과 관련된 세미나에 가니 정면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옆에 있던 라이아에게 물어보니, 왼쪽에 앉은 이가 지로나 대학의 요셉 마리아 테리카브라스(Josep Maria Terricabras) 철학과 교수, 오른쪽은 카탈루냐 주정부에서 나온 마르티 에스투르크 악스막허(Marti Estruch Axmacher)라고 소개했다. 카탈루냐인 대부분이 테리카브라스 교수를 아냐고 묻자 라이아는 "테리카브라스 교수가 TV 및 라디오에서 철학 강의를 통하여 유명인사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카탈루냐의 도올 김용옥 선생쯤이라고나 할까. 목소리 톤은 물론 달랐지만, 열성적으로 카탈루냐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서 어느 정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이날 세미나에 온 카탈루냐인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강의를 듣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잠시 세미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악스막허: "카탈루냐가 왜 독립을 해야 합니까?" 테리카브라스: "2005년 카탈루냐 의회는 기존의 자치권을 보다 강화한 새로운 자치법(카탈루냐에 대한 자치법규, Estatut d'Autonomia de Catalunya)을 통과시켜 스페인 의회로 보냅니다. 이 법안은 스페인 의회에서도 지지를 받았지요. 하지만 보수 세력인 스페인 국민당(Partido Popular, PP)이 이 법안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고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청구했어요. 2010년 7월 9일 헌법재판소는 새로운 자치법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이 위헌결정으로 인해 카탈루냐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게 되지요. 특히 9월 11일의 시위는 독립에 대한 저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 경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중앙정부의 무능으로 인해 아직도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자치권 개혁의 좌절과 해결되지 않는 경제문제로 인해 이제는 독립에 대해 말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악스막허: "하지만 일부에서는 너무 민족주의적이라고 제기할 수도 있는데?" 테리카브라스: "물론 이 우려에 대해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독일의 나치정부와 스페인의 프랑코의 독재정부가 이를 이용해서 통치했었던 것은 사실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은 민족주의가 아닌 정체성입니다. 지금 당장은 민족주의적 요소가 너무 강하게 보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치와 프랑코 정권과는 다르게 철저히 민주주의적 절차를 요구하는 독립이며, 현재도 그렇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독립을 이룬다면, 지금 보이고 있는 민족주의적 요소는 더욱 엷어질 것입니다." 악스막허: "인구를 생각한다면 카탈루냐는 소국이 아닌가? 그리고 EU와의 연대에 대한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테리카브라스: "카탈루냐 인구는 750만 명이며, 카탈루냐어를 쓰는 사람은 발렌시아 지역과 합치면 그 인원이 천만 명이 넘습니다. 이 인구 규모는 룩셈부르크와 오스트리아보다 더 큰 규모입니다. 또한 카탈루냐의 경우 스페인의 다른 지역보다 산업이 발전되어 있고, 국민소득도 유럽연합 평균치를 웃돕니다. 원래 카탈루냐는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이었습니다. 다만 스페인이 EU에 가입하고 지원금을 받아서 경제평준화 정책을 펴서, 카탈루냐가 이전보다 역할이 떨어져 보일 뿐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기존의 이점을 잘 살리고, 이를 계승한다면 남부의 벨기에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회적 관점에서의 독립과정은 장기적인 시간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프로세스는 스페인 중앙정부에서 협조만 한다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카탈루냐의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정치적 프로세스를 촉진시키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민자 4명 중 1명은 경제위기로 이주" 자치법안 문제 및 EU에서의 독립된 카탈루냐의 역할은 신선한 주제였다. 라이아의 도움을 받아 두 발제자와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는 카탈로니아 인은 얼마나 되나? 그리고 카탈루냐를 제외한 EU에 거주하는 카탈루냐인은 얼마나 되는지? 악스막허: "베를린에는 현재 1000명이 살고 있고, 독일 전체에는 1만 명, EU지역까지 확대하면 20만 명이 넘습니다. 아시다시피 카탈루냐의 전체실업률은 25%이고, 청년실업률은 50%가 넘지요. 이로 인해 최근 2년 만에 6만 명에 가까운 카탈루냐인들이 다른 EU국가로 이주하였습니다. 카탈루냐 인구와 비교하면 적은 규모일 지 모르지만, 이민자 4명 중 1명은 경제위기로 인한 이주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 카탈루냐 독립운동이 이전에도 있었나? 테리카브라스: "아시다시피 1714년까지 카탈루냐는 독립된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때 카탈루냐는 신성로마제국 및 영국 연합군에 가담해 프랑스 왕국에 지원받은 스페인 왕가에 저항했죠. 결국 바르셀로나 공방전 끝에 패해 자치권이 소멸하게 됩니다. (위에 언급된 9월 11일은 바르셀로나 공방전 끝에 스페인-프랑스 연합군에 항복한 날이기도 하다. 현재는 카탈루냐의 날로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내년이 바르셀로나 공방전 300주년이 됩니다. 비록 자치권을 뺏겼어도, 카탈루냐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9세기 말에는 카탈루냐의 문예부흥운동이 있었고, 이는 카탈루냐어의 발전을 촉진시켰습니다. 또한 20세기 초에는 카탈루냐 민족주의 정당이 설립되는데, 문예부흥운동과 함께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발흥시켰으며, 현재도 이것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카탈루냐 민족주의는 후에 스페인 내전과도 연결이 되는데, 당시 그들은 파시스트적인 프랑코에 대항하여 공화파진영에 참가했다. 결국 프랑코에 의해 패하고, 카탈루냐는 프랑코 정권 40년동안 정치적인 압력을 받았다.)
- 사실 한국에는 일부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카탈루냐 독립문제에 대한 관심이 적다. 카탈루냐 독립은 주로 유럽경제위기와 연관되어서 다루어졌는데, 한국이나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전략은 없는지? 악스막허: "우선은 EU 다음은 북미 다음은 동아시아로 전략을 짜고 있습니다. 독립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려면 국제적 승인이 필수이기 때문에 이를 위한 노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테리카브라스: "물론 각 문화가 다른지라 철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철저한 민주주의적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설사 정치체제가 다르더라도 비폭력적이고 민주적으로 간다면, 보편적으로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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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에서 카탈루냐 독립을 위해 시가행진을 하는 모습. 왼쪽에 서 있는 이가 필자의 친구인 라이아. 그녀는 기자로서의 활동 뿐 아니라 카탈루냐 독립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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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세미나는 '산트 조르디 2013(Sant Jordi 2013), 카탈루냐의 전통: 4월 23일 산트 조르디 축제를 위한 책과 장미' 축제 중 일부분이다. 왜 책과 장미인지 자료를 찾아보니, 카탈루냐에서는 친애하는 사람들과 선물을 주고 받는데, 원래 남성은 여성에게 장미를, 여성은 남성에게 책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오늘날은 성별과 상관없이 책을 교환하며, 유네스코에서 이 전통을 받아들여 4월 23일을 세계 책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내가 참석했던 세미나는 이 축제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정신이 카탈루냐 문화를 오랫동안 유지한 비결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가 끝나니 벌써 오후 9시가 넘었다. 라이아와 전철역까지 같이 걸어갔는데,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매일 아침에 컴퓨터를 켜면 자기 친구들이 독일로 오고 싶다는 이메일이 가득차 있다고. 하긴 독일의 경우 EU에서 경제적으로 그나마 안정적인 데다가 실업률도 최근 많이 줄어들었다. 한국 언론에서는 주로 주식시장과 연계해 유럽위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경제 위기를 체감하고 있는 당사자에게 말을 들어보니 한국의 IMF직후 졸업을 한 90년대 초반학번들의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다.
라이아와 그의 친구들은 스스로의 현재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정치경제적 실험을 전개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라이아의 노력에 대해 세미나가 아니었으면 무지했던 터. 하루 빨리 라이아의 고국인 카탈루냐의 봄이 오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