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new
BGM 출처 : https://youtu.be/IdsQf3xhD3s
윤준경, 버튼의 힘
눈을 뜨자 두 개의 버튼이 선택을 기다린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제 3의 버튼을 누른 건 순간의 잠재력이다
심지어는 혼몽한 꿈에서 까지도
수시로 선택을 요구하는 버튼
3월의 눈보라를 뚫고 다급한 전갈이 왔다
예스와 노 사이에서
감성이 강한 버튼, 누르기도 전에 부저소리를 낸다
나의 허접한 연애도 버튼 한 번에 완결되었다
그가 버튼을 눌렀을 때 나는 순순히 문을 열었다
버튼이 있어, 고로 내가 존재하는데
어떤 이는 버튼 한 번에 영영 버튼을 잃기도 한다
평생 엇박자를 내는 나의 버튼
경우의 수를 읽지 못한다
접촉 불량, 리허설이 끝나도
본공연은 없다
길상호, 계단 길
발목이 부은 할머니는
오르막 계단 길
몸뚱어리 하나만도 무거워
그림자 떼어놓고 오른다
난간을 잡고 헐떡이던 숨소리
잠시 민들레처럼 주저앉아
샛노래진 얼굴을 닦는다
굳어버린 할머니 등처럼
꼬깃꼬깃 사연들 접혀 있는 길
한 해 또 지나면
더 가팔라질 것인데
이승 고개 후딱 넘어야지
혼잣말을 들은 오후 햇살이
할머니 주름 계단에
주르르 미끄러진다
오두섭, 대장간에서
펄펄 끓게 해놓고는
모질게도 두들겨 맞는다
괭이가 되기 전의 그것
순식간 기역자로 제 스스로 몸을 구부려
풍덩 뛰어들고 만다, 웅덩이 속으로
그것이 되기 전의 호미
할미꽃대처럼 제 목을 부러뜨리고는
진흙바닥에 주둥이를 쳐박고
내가 되기 전의 나는
무엇에 저항한 과거였는가
누군가에게 작은 망치 하나
쥐어주지도 않았잖은가
내 비겁한 성깔의 이 식어빠진 불덩어리
연왕모, 마른 꿈
길바닥에 뚫린 구멍
그 안은 깜빡 잠들 수 있는 곳
물이 흐르는가 싶더니
바람이 지나가고
해바라기가 만발했다가는
어느 새 져버렸다
젖은 북어들이 몸을 펄떡거리다
이내 숨죽여 흘러갔다
주머니는 터져 있었다
구슬, 딱지 모두 사라져버리고
십 원짜리 동전 하나 남아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왔던 길과 가야 할 길의 중간에 서서
내가 품었던 것들을 그리워했다
정복여, 빛들의 저녁
사물을 빠져나온 빛깔들이
노을 속으로 들어간다
저녁은 빛들의 우편배낭
바람은 사물들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며
숨어 잇는 빛깔마저 내놓으라나
키득 웃던 피자집 처마가
빨강을 토해낸다
길가 꽃달개비 남빛을 내려놓고
용궁반점 오토바이는
노랑을 흘리며 질주한다
플라타너스는 초록을 여미다
힘이 부쳐 그냥 어둑해지고
건널목 줄무늬 티셔츠의
뚱뚱한 갈맷빛도 저 배낭 속으로
가득 넘실대는 색들의 강
저녁이 힘껏 강을 메고
처음 왔던 곳, 그 모든
사물들의 아침에게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