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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발발에 있어, '조선'의 입장이 아닌 '청나라의 입장
게시물ID : history_85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wHat
추천 : 14
조회수 : 1186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04/27 11:31:14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병자호란에 대한 언급을 보면, 이는 조선 중심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컨이 조선이 이러했기에 전쟁이 안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고

조선이 이러했기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식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런 시각은 전쟁의 주체를 상당히 조선의 입장에서 보는 일인데



그런데, 이런 경우를 보자면, 당시 조선의 상황에 대해 자주 언급을 하더라도,
정작 당사자인 청나라의 입장에 대해서는 언급이 적거나,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보입니다.

즉 청은 별로 생각도 없다가 조선이 먼저 동기를 만들어서 전쟁했다는 식이고
그렇지만 않았다면 전쟁은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고


이 가운데 되려 침략군인 청나라가 전쟁에서는 수동적인 위치에서 있게됩니다.



그러나 청나라를 중점에 놓고 이야기를 보자면



이 당시 청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누르하치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것은 이성량이 뒷배를 봐주면서
무순, 청하, 관전, 애양 네 개의 관을 이용한 활발한 교역의 힘이 있었고,


당연히 명나라와 전면전이 붙어진 후부터, 명나라와의 교역은 모조리 끊겼습니다. 사실 그전부터 명나라는 교역 정지 명력을 내렸습니다.


누르하치 시절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농업 경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누르하치 당대에는 전쟁이 계속 되었던데다가, 여진과 한인의 공존 문제도 있고 수도도 요양에서 심양으로 옮겨가는등 여러모로 불확실한 면이 많아 농경에 집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1625년 이래로 요동 한인 인구의 개편, 몽고의 귀속에 따른 대규모 인구 증가, 더구나 기상 악화까지 더해 흉작이 겹치면서 후금의 경제상황은 위풍당당한 군사적 면모와는 달리 꽤 곪아가고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관련 기록 중에는 이런 언급도 있습니다.





 "나라가 굶주려 곡식 한 승(升)에 은 8량 값이나 되었다. 이 나라에 은은 많았으나 무역할 곳이 없어서 은의 값은 싸지고 여러가지 재화의 양은 비싸졌다. 좋은 말 한 필에 은 300량, 좋은 소 한 필에 은 100량, 무늬있는 비단 한 필에 은 150량, 도둑이 만연하여 사람을 죽이고 혼란스럽게 되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 영원성 전투까지 막 실패한 참이었기에,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太宗文皇帝實錄 권2 에서는, 1627년 즉위 직후 홍타이지는 원숭환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막대한 양의 예물을 요구했습니다. 여기까진 흔한 으름장으로 여길만하나 몇달 후 곧 액수를 반으로까지 줄이면서 또다시 예물을 요구했습니다. 처음의 요구는 금 십만량, 은 백만량, 비단 백만필을 주고, 화의가 성립된 이후에는 금 일만량, 은 십만량, 비단 10만필 등을 바칠 것을 요구했으나, 이후 이런 소리를 공연히 덧붙였던 것입니다.


 "귀국이 (예물을 보내기에)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면, 처음 화의를 맺는 예로서(예물 액수의) 반을 덜어도 됩니다."



심지어, 명나라 황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생결단의 여지보단 독립적인 요동 국가로서 명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움직임까지 보입니다.  심지어, 요동의 관리들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언급할 시에는 명나라 황제보다 한 글자 아래에, 명의 관리보다는 한 글자 위에 써줄 것을 스스로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뜻을 헤하려 天보다 明의 황제를 한 글자 내리고, 명 황제보다 우리를 한 글자 내리고, 우리보다 명의 관리들을 한 글자 내려서 썼습니다. 당신(관리)들을 우리와 대등하게 쓰면 그 편지를 우리는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 당시 모습을 보면 정말 경제적인 요구가 상당히 높았고,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재물을 빼았는가, 하면 곡물값등은 사정없이 올라가면서 몇년 전에 비해 몇배나 급상승하는 


경제적 재앙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에 청이 조선에게 요구한것은 온갖 자질구레할 정도의 생필품의 목록들 일일히 적어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조선에 요구했던 점이, 그 당시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점으로도 보입니다.




즉 병자호란은 


조선이, 소위 말해서 '개기고 안 개기고'
즉 어떤 정책을 취했고 안취했고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청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벌어진 침략 전쟁이고


그렇다면 전쟁의 주체는 청나라의 지분이 상당수를 차지할텐데, 오로지 조선의 외교정책으로
청나라의 침공 원인을 설명하려는건 상당히 괴리감이 있죠.



 이 당시 청나라가 얼마나 내부적 문제가 심했는가 하면, 




1621년 이후로 후금의 만주족과 한족 사이에 대립이 극심해지고
불평등한 대루을 받은 한인들은 식량 공급에 심각한 위협을 느껴 폭동의 가능성을 보이고


1621년에서 162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먹을 곡식이 없는 한인들은 식량을 숨기고 만주족은 그것을 빼앗으면서 갈등이 절정에 치닫고


경제적 압박 아래서 만주족의 한인 착취가 이어지며 1623년에는 한인의 반란이 일어나고 1625년에도 연이어 반란


1627년에 이르면 후금은 그야말로 경제적 재앙에 가까운 상태가 되는데다 한계에 달한 인구를 부양할 방법도 없고


군사를 보급할 수도 없고 27년의 곡물값은 4년전에 비해 무려 여덞배가 증가하며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생기고 곡식 창고는더 비어버리고, 말은 너무 지치고 약해져 적을 추격할 수 없고

랴오시에서 농업 생산을 늘리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이 당시 만주족 정권은 정권의 붕괴 위협까지 당하고 있었습니다.

신청사 학파로 알려진, 피터 퍼듀의 저서 중에 언급은 병자호란을 이러한 경제적인 관점으로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그러나 1621년의 랴오동 정복으로 사실상 만주족과 한인 사이의 갈등이 더 극심해지고, 더 심각한 생존 위기로 이어졌다. ……만주족은 1621년부터 162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먹을 곡식이 없어서 곡심을 숨기려는 한인들에게서 짜내야만 했고……경제적 압박 아래서 만주족은 자기네 가구의 한인을 착취했고……


그러나 1627년 만주 국가는 '경제적 재앙'의 문턱에 있었다.……1635년과 1637년에 또 식량 위기가 닥쳤다……조선은 다시 한번 매력적인 목표가 되었다."

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 中 164p~166p




중간에 생략한 부분들은, 위에 언급한 곡물값 폭등과 소요 사태에 대한 부분등입니다.



글을 새로 작성하는 글이 아니라, 이전에 연재글 등에서 쓴 내용을 부분적으로 옮겨적은 내용이라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중구난방하는 부분이 아무래도 있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전쟁에 있어서 그 동기에 대한 부분은 '침공자'의 입장에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병자호란에 대한 일반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침공을 당한 자'의 입장에서 대부분의 상황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 부분에 대한 의문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물론 양측의 입장이 모두 중요하겠으나, 병자호란은 특히 후자의 입장으로만 서술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당장 임진왜란이나 고수, 고당전쟁만 해도 이 정도로 후자의 입장만 강조되지는 않은 편이죠.



참조

김한규 한중관계사 2권, 719~720쪽
人蔘과 疆域 : 后 金 - 淸의 강역 인식과 대외 관계의 변화 - 김선민
중국의 서진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ural Eurasia - 피터 퍼듀
‘청(淸)과의 외교실상과 병자호란 ─ 오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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