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효환, 앞서 간 사람들의 길
칠흑의 길을 앞서 간 이들을 따라
바다를 닮은 호수를 품은 내륙 도시를 지난다
호반을 둘러싼 아름드리 오동나무
굽고 비틀리고 휘어진 긁은 가지 마디마디
먼저 이 길을 간 사람들의 삶이 그랬을지니
더디게 더디게 오는 여름 저녁놀 아래서
편지를 쓴다, 누군가 꼭 한 번 읽어줄
엉엉 울며 혹은 눈물을 삼키며
그렇게 걸어간 사람들에 대하여
그 슬픈 그늘에 대하여
상해 가흥 무한 남경 그리고 중경
한 발짝도 내다볼 수 없는
농무 자욱한 길을 더듬으며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일기를 쓴 사람
토굴에 웅크려 떨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사람
다시 그날이 와도 숙명처럼
그 길을 묵묵히 갈 사람들에게
철 이른 들국화라도 만나면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이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를 담아 가만히 들꽃 소식과 함께
바람에 실어 보내리니
고맙다고
고마웠다고
그래서 나 오늘 다시 이 길을 간다고
무심히 여름 벌판을 적시는 강물에도 길이 있다고
길 너머 다시 길이 있다고
문정희, 돌은 한 채의 수도원이다
돌은 한 채의 수도원이다
지는 해도
떠오르는 해도 좋아
그 속에 쓸쓸함으로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좋아
묵직한 심장을 속에 담고
입술 아닌 것으로 신을 호명하는
돌은 한 채의 고해(告解)이다
결코 늙은 적이 없는
돌은 한 채의 도서관이다
이윽고 거대한 침묵 가까이 가서
가만히 거기에 몸을 기대고 앉는다
박순원, 물
내 몸은 반 이상이 물이다
당신이 나를 잡아먹는다면
반 이상은 물을 먹는 셈이다
나는 스폰지가 물을 머금고 있듯이
물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지구를 흘러다니던 물이 나에게도
흘러와 흘러가는 것이다
나는 걸어다니는 구름이고 누워서
코를 골며 숨쉬는 강이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웅덩이며 술을
마시고 출렁거리는 바다다
나는 푸르게도 희게도
검게도 될 수 있다
무색투명할 수도 있다
누가 나를 잡아먹더라도
반 이상은 물을 먹는 셈이니
나는 아까울 것이 없다
연왕모, 늪의 입구
그림자들이 늪지를 다녀갔다
무언가를 버리고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버린 것이
내 곁에 있다
가슴이 이상해요
구멍 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질 않아요
아무리 깊게 숨을 쉬어도 채워지질 않아요
내 가슴을 좀 채워주세요
흙이라도 한 삽 퍼 넣어주세요
그림자들이 돌아간 거리에선
마른 가로수들이 뽑혀나갔다
가로수로 오인된 사람들도 뽑혀버렸다
그들은 트럭에 실려 나무처럼 빳빳하게 굳어져갔다
스스로 멎어 있음은 혼돈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나무들이 흔들렸다
정복여, 독신
버려진 장독은 아무도 열지 않아
스스로 제 몸에 금을 긋는다
칼날은 아주 오래된 햇살
천둥소리, 그리고 어떤 기척들
더이상 빛도 소리도 아닌
캄캄함이 터지고
그 움직임에 한때 독을 드나들며
잘 놀았던 모두가 몰려와 주위를 맴돈다
독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일시에 깨어나는
왁자한 음표들
독은 잔뜩 부풀어
풀벌레 울음 가장 가까운 곳
그곳에 실금이 간다
마침내 맞금이 간다
독은 그렇게 스스로 몸을 열어
오래된 어둠을 소리로 바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