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세월호 침몰, 열쇠를 쥐고 있는 국정원
세월호 침몰 사고의 책임을 지고 5월 22일 남재준 국정원장이 사퇴했다. 왜 남재준 국정원장은 이 시점에 사퇴했을까? NLL 정상회담 대화록 무단유출, 서울시 간첩 조작사건에도 굳건히 건재했던 이가 남재준 국정원장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국정원이 어떤 중차대한 실책을 했다는 사실은 찾아보기 힘들다.
동반 사퇴한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위기관리센터의 책임자였다. 더욱이 김장수 실장은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는 실언으로 구설수에 올라 도의적으로 사퇴해야 마땅했다. 과연 남재준 국정원장이 국가 위기관련 정보를 모두 총괄하기 때문에 전격 사퇴했을까. 혹 세월호 침몰의 미스터리를 풀 해답을 국정원이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1. 국정원은 무엇을 감추려고 하는가?
(1) 전문가를 통제한 국정원
세월호 사건과 같은 해양조난 사고는 상당한 전문분야다. 침몰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는 배의 무게중심, 평행수, 복원력, 조류와 항적기록 등을 알아야 한다. 또한 구조실패의 책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선박의 구조, 안전관리, 재난관리체계 등 복합적인 요소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침몰의 원인과 구조실패의 책임을 밝혀야할 전문가들이 하나같이 침묵하고 있다. 이에 대해 CBS는 4월 22일 “세월호 사고와 관련된 민감한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제기해왔던 대학교수들이 사고 발생 6일째인 21일부터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닫았다”고 폭로했다. CBS는 당시 “이곳 저곳에서 압력이 들어온다. 주로 정보부처라고 보면 된다”는 A교수의 말을 전하며 국정원의 ‘세월호 인터뷰 통제’ 의혹을 제기했다. 국정원이 압력을 넣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배정훈 SBS ‘그것이 알고 싶다’ PD는 ‘세월호’ 편을 제작 중이던 지난 22일 트위터에 “이번 주 방송을 앞두고 의견을 구하던 학자들이 하나둘씩 인터뷰 약속을 취소해버렸다. 점점 섭외가 힘들어지더니 끝내 불가능해져 버렸다. 사고를 분석해줄 전문가들이 침묵하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세월호’ 편에서는 실제 해양학 관련 교수가 나오지 않았다. 방송에 나온 전문가는 세월호의 증축 문제를 지적한 와타나베 일본 도쿄 해양대 교수와 세월호·진도해상관제센터(VTS) 간 교신내용 조작의혹을 제기한 배명진 숭실대 정보통신전자학부 교수에 불과했다.
(2) 침몰원인에 대한 은폐 의혹
세월호 침몰 당시 해양경찰청이 사고 원인으로 '좌초'를 지목했고, 국정원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세월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소속 야당 의원들은 2일 해양경찰청 기관보고에서 사고 당일 해경 상황실의 녹취록을 전격 공개했다. 녹취록에 따르면 사고 당일 국정원은 사고 직후부터 해경 측에 두 차례에 걸쳐 전화를 걸어 사고 원인 등을 거듭 확인했다고 한다.
국정원은 사고 직후인 오전 9시 28분 "사고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은 데 이어, 오전 9시 55분 다시 해경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암초라던데 맞나요"라고 재확인했다. 해경 상황실 측은 "아니고 원인 미상이고 그냥 침수된 겁니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해경 상황실은 오전 11시 4분 사고원인을 묻는 총리실 측에는 "암초 위를 올라탔다고 한다"면서, 국정원이 언급했던 '암초'를 지목해 보고했다.
분명한 사실은 국정원이 해경보다 먼저 암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획득했다는 것이다. 해경은 국정원이 암초라는 질문을 한지 약 1시간 후 총리실에 좌초의 배경으로 암초를 지목했다. 사건 초기 박근혜 정부 산하 기관들이 국정원을 통해 ‘암초’가 세월호 침몰 원인이라고 공유했다는 것을 위와 같은 정황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검경합동 수사본부는 세월호 침몰의 원인을 선원의 조타미숙으로 인한 ‘급변침’으로 몰고 갔다. 국정원과 총리실이 인지했던 애초에 ‘세월호가 암초에 올라타 침몰했다’는 정보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해경 본청상황실이 “정확하게 그 이야기는 하면 안 될 것 같고요”라고 표현했듯이 국정원이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해 은폐했을 가능성이 높다.
(3) 최초 인지 시점에 대한 은폐
국정원은 아직까지 세월호 침몰 인지시점에 대해 "세월호 사고를 방송뉴스를 보고 알았고 최초 사고인지 시점은 4월 16일 오전 9시44분" 이라고 주장해왔다. 이 터무니없는 주장은 애초에 거짓말로 드러났다.
우선 국정원이 해경본청 상황실에 사고원인에 대해 질문한 9시 28분은 청와대 최초보고시간보다 3분 빠른 시점이다. 특히 “사고 원인은 아직 현재 기초적인 것만 확인할 수 있나요”라는 표현은 국정원이 세월호 침몰을 상당시간 전에 인지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질문이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5월 20일 국정원의 여객선 진도 침몰 참사 인지와 관련, “제가 듣기로는 (국정원이) 전화로 사고 보고를 받았다고 돼 있고, 그 보고는 세월호 선원이 한 것으로 들었다”고 밝혔다. 한편 경향신문은 “김한식 청해진해운 사장 등은 사고 직후인 4월 16일 오전 9시10분쯤 국정원에 문자메시지로 사고 사실을 보고했다”고 보도했다.
정홍원 국무총리의 발언에 의하면 국정원은 청해진해운 사장으로부터 문자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세월호 선원으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은 것이다. 즉 세월호 선원이 연락한 시간은 청해진 사장이 문자로 보고한 시간보다 더 빨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는 "세월호 선원은 국정원 인천지부에 이 사실을 처음에 알렸던 것 같다"며 "국정원이 언제 몇 시 몇 분에 사고를 처음 알게 됐는지는 이번 사고 진상규명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국정원은 최소한 9시 10분보다 이른 시점, 즉 사건이 최초로 접수된 직후에 사건을 인지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국정원의 사건 인지시점은 청와대와 대통령에 대한 보고시점, 지휘체계와 직결되는 문제다. 국정원이 자신의 최초인지 시점을 은폐하는 데는 세월호 침몰의 초기대응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교묘한 꼼수인 것이다.
2. 국정원은 세월호가 침몰할 줄 알고 있었나?
(1) 세월호의 이상한 해양사고 보고계통
“국정원은 세월호가 침몰할 줄 알고 있었나?” 다소 도발적인 질문이다. 오래된 세월호가 구조변경을 한데다 과적까지 하니 걱정이 되었을까. 그렇다면 왜 침몰한 세월호는 사고가 났을 때 국정원에 최우선적으로 1차 보고를 하게 돼 있었을까. 실제로 세월호 선원은 해경보다 국정원에 먼저 보고했다. 국정원이 구하러 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세월호 운항관리규정의 ‘해양사고 보고 계통도’에 따르면 세월호가 사고가 났을 경우 가장 먼저 국정원 제주지부와 인천지부, 해운조합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해양경찰, 인천지방해양항만청, 국토해양부(현 해양수산부)는 다음 순서이다. 계통도에는 국정원 제주, 인천지부 전화번호와 세월호가 사용하는 조난비상 통신주파수(VHF 채널16, 11)등 도 적혀있다. 청해진 해운은 2013년 2월 25일 세월호 운항관리규정을 작성했고, 해경은 이를 승인했다.
민간회사인 청해진 해운이 왜 국정원에 1차적으로 보고했는지 납득하기 힘들다. 승객 구조가 시급한 때에 구조와 큰 관련이 없는 정보기관에 보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해운업계 종사자는 “국정원이 대테러업무 때문에 부두나 공항에 직원을 상주시키고 있지만 해난사고 때도 다른 곳에 앞서 1차 보고를 하도록 명시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경향신문은 국정원이 세월호 사고 상황을 우선 보고받도록 한 것은 세월호가 전시에 군수물자와 피란민 수송을 위해 동원되는 ‘국가보호장비’로 지정돼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제시했다. 국가보호장비 지정은 2000t급 이상 배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고 한다. 하지만 평시에 국가가 별도로 관리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의문점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2) 오직 세월호에만 적용되는 국정원 보고규정
세월호와 쌍둥이 배라고 하는 인천~제주 행 6000t급 여객선인 오하마나호에는 국정원 보고 규정이 없다. 청해진해운이 지난 2월 7일 작성한 오하마나호 운항관리규정은 세월호의 규정과는 다르다. ‘오하마나호 운항관리규정’을 보면 사고 시 구조와 관련된 해운조합, 청해진해운 제주본점, 인천VTS와 해군2함대 상황실에 보고토록 돼 있다.
7월 10일 오전에 비공개로 진행된 세월호 국조특위 국정원 기관보고에서 정의당 정진후 세월호 국조특위위원은 "해양경찰청으로부터 받은 4월 현재 국내 1000톤급 이상 내항 여객선의 운항관리규정에 따르면 해양 사고가 발생했을 때 국정원에 별도의 보고체계를 갖추고 있던 여객선은 17개 여객선 중 세월호가 유일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진후 위원은 "국정원에 답변을 요구한 결과 '세월호 운항관리규정은 선사인 청해진해운이 작성해 담당 해양경찰서로부터 승인받은 것으로 국정원은 작성·승인에 전혀 관여한 바 없다. 다만 국정원 인천과 제주 전화번호가 표기된 것은 국정원이 대테러 주무기관이어서 선박 테러·피랍사건에 대비해 포함했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답변을 보내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답변은 17개가 넘는 선박 중에 유일하게 세월호에만 국정원 보고체계가 적용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통합진보당 세월호 대책위원회(위원장 이상규)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별첨자료인 ‘해난사고 보고계통도’는 청해진해운에서 보유한 세월호와 오하마나호에만 존재한다고 한다. 다른 선박들은 ‘운항관리규정’에만 ‘해양사고 등 비상사태 발생 시 연락기관’이 명시되어 있다.
운항관리규정’은 해경에서 일정한 기준을 제공하면 선박업체는 배의 상황에 맞게 수정해서 해경에 제출하는 정도이다. 즉, 해경은 별첨 자료로 ‘해난사고 보고계통도’를 요구하고 있지도 않은데 유독 세월호는 운항관리규정이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계통도에 ‘국정원’을. 오하마나호는 ‘해군2함대’를 별첨자료로 포함시켜 제출한 것이다.
세월호 운항관리규정처럼 해난사고 시 국정원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 선박은 단 한척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다른 선박들과는 달리 청해진해운이 보유하고 있는 세월호와 오하마나호만 운항관리규정에 ‘해난사고 보고계통도’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3. 국정원은 미스터리를 밝혀야
국정원은 세월호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다. 세월호 사건의 원인을 가장 먼저 입수한 기관, 세월호 사건을 가장 빨리 인지한 기관은 국정원일 가능성이 높다. 국정원은 사건에 대한 각종 사실들을 은폐하고 있다. 세월호에만 존재하는 국정원 보고 규정은 여전히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다. 국정원은 세월호의 실체적 진실에 대해 낱낱이 해명해야 할 것이다.
[원문출처] 우리사회연구소[특별기획]세월호 구조, 안 했나 못 했나 2. 군은 구조로부터 자유로운가① 본험 리처드호는 무엇을 하였나 세월호 구조와 관련해 해경에 비난이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과연 해경만 문제였을까? 해경과 함께 구조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군, 특히 해군은 과연 아무 문제가 없었을까?
한국군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사고 직후 구조 지원에 나섰던 미군부터 살펴보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직후 미군이 본험 리처드호라는 대형 헬기 항공모함을 투입하겠다고 하자 많은 국민들이 기대를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미군은 별다른 구조작업 없이 철수해버리고 말았다. 일부 언론은 한국군의 거부로 미군이 철수했다고 보도하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먼저 이번 구조 지원에 나선 본험 리처드호는 어떤 함정인지 살펴보자.
본험 리처드호(LHD-6)는 1998년 8월 취역한 미 해군의 와스프(Wasp)급 다목적 상륙강습함이다. 모항은 일본 나가사키현 사세보항이며 오키나와 주둔 미군 제3해병원정군(MEF) 산하 해병대원들을 상륙작전에 투입시키는 게 주 임무다. 헬기 여러 대가 동시에 이착륙할 수 있는 대형 비행갑판을 갖춘 헬기 항공모함으로 수송용 대형헬기 시나이트(CH-46) 42대, 대잠헬기 시호크(MH-60) 6대, 수직이착륙기 해리어(AV-8B) 5대,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MV-22)를 탑재했다. 승조원은 장교 104명, 사병 1004명이며 1894명 해병대원이 탑승 가능하다. 또 의료 시설이 있어 응급환자 긴급 구호도 가능하다.
본험 리처드호는 세월호 참사 직후 사건 현장에 출동한 가장 큰 함정으로 헬기도 많이 보유했고 의료시설까지 있어 구조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본험 리처드호는 세월호 구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본험 리처드호는 왜 거기에 있었나
그렇다면 사고 당시 본험 리처드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일단 본험 리처드호는 3월 27일부터 2014 한미연합 쌍용훈련에 참가했다. 제주 남쪽 해상에서 시작해 포항에서 대규모 상륙훈련을 진행하는 게 쌍용훈련의 주요 골자다. 이 훈련은 4월 7일 끝났다. 특별한 일정이 없다면 사세보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 당시 본험 리처드호는 서해에 있었다.
사고 당시 본험 리처드호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처음에 “한반도 서해상”에 있었다고 했다가 세월호 참사와 한미연합훈련 관련설이 나오자 20일 “약 155km 떨어진 공해상에 있었다”고 밝혔다. 4월 16일자 라디오코리아도 “사고 지점 북서쪽 155km 해상”에 있었다고 보도했다. 사고 지점에서 북서쪽 155km 해상이면 공해상이 맞다.
그런데 4월 16일 성조(Stars and Stripes)지는 알로 아브라함슨(Arlo Abrahamson) 주한미해군 대변인의 말을 인용해 본험 리처드호가 사고 당시 100~115해리(약 200km 안팎)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보도했다. 북서쪽으로 200km면 대략 군산 앞바다까지의 거리다. 군산 앞바다는 세월호 경로 가운데 유일하게 공해상을 지나는 경로다. 세월호가 군산 앞바다 공해상을 지났을 새벽 2~5시 사이에 본험 리처드호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두 배가 서로 만나거나 근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본험 리처드호는 서해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김민석 대변인은 16일 “정기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같은 날 성조지도 “일상적인 순찰을 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4월 25일자 아주경제도 “통상적인 순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일본을 모항으로 하며 상륙작전에 투입되는 대형 상륙강습함이 왜 서해에서 순찰을 하는지 의문이다. 본험 리처드호에는 대잠헬기 시호크가 있기에 잠수함 수색 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단순 순찰 활동이 아니라는 보도도 있다. 성조지는 17일자 보도에서 “일상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고 했다. 물론 순찰 활동을 작전이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4월 16일 라디오코리아는 “자체 훈련을 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다른 여러 언론들도 “훈련”을 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무슨 훈련이었을까?
김민석 대변인은 20일 “사고 해역은 훈련을 위한 항행금지 구역으로 선포되지 않았고 인근 해상에서 어떠한 연합해상훈련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본험 리처드호는 한국군 없이 미군 단독으로 훈련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세월호 참사가 있던 16일에는 두 개의 한미연합훈련이 진행 중이었다. 하나는 한미연합 공군훈련 맥스선더(Max Thunder)로 11~25일 한반도 상공 전역에서 진행하였다. 이 훈련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103대의 항공기가 참가했고 미군은 공군과 해병대가 참가했다. 다른 하나는 한미연합 공군 전투탐색구조훈련 퍼시픽선더(Pacific Thunder)로 14~18일 오산기지, 강원도 태백 지역 등에서 진행했다.
물론 두 훈련은 공군 위주의 훈련으로 본험 리처드호가 참가했다는 보도는 없었다. 두 훈련에 동원된 전투기, 헬기 가운데 본험 리처드호에 탑재된 기종도 없었다. 하지만 본험 리처드호가 두 훈련을 위한 지원 작전을 펼쳤을 가능성은 있다. 특이한 사실은 4월 16일 성조지가 본험 리처드호는 4월 15~18일 서해에서 해상 작전을 실시할 예정이었다고 보도한 점이다. 퍼시픽선더 훈련 기간과 거의 일치하는 기간에 어떤 작전을 예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16일 오전 8~9시에는 세월호 이동 경로에서 여러 사격훈련도 예정되어 있었다. 국립해양조사원이 발표한 항행경보에 따르면 ▲가덕도부근(R-124) 해군 사격훈련 ▲격렬비열도 남서방(R-80) 공군 사격훈련 ▲안마도 북서근해(R-123) 해군 사격훈련 ▲임자도 서방근해(R-84) 공군 사격훈련 등이 예정되어 있었다. (괄호 안의 코드는 첨부한 ‘한국연안 해상사격훈련 구역도’를 참조하라.)
물론 이 훈련들이 진행되는 구역 인근을 세월호가 통과한 시점은 16일 새벽이었다. 하지만 훈련을 앞두고 미리 적군 잠수함이 침투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본험 리처드호가 새벽에 사전 잠수함 수색작업을 했을 것이라는 가설도 가능하다.
본험 리처드호가 16일 오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또 그것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다.
왜 본험 리처드호를 그냥 돌려보냈나
이제 본격적으로 본험 리처드호의 수색 과정을 살펴보자.
김민석 대변인은 16일 “미국 7함대는 한국 해군의 요청에 따라 필요한 지원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18일에는 “16일 오전 11시 사고해역에서 155km 떨어진 곳에 있던 미군 상륙함 본홈 리처드에 협조를 요청했다”고도 했다. 17일자 성조지 보도에도 아브라함슨 대변인이 “한국의 요청에 따라” 수색 지원을 했다는 발언이 나온다. 따라서 본험 리처드호의 수색 지원은 한국군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7일자 성조지 보도에 따르면 본험 리처드호는 지원 요청을 받고 곧바로 전속력으로 사고 해역으로 향했으며 구명정을 실은 두 대의 시호크 헬기를 띄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 헬기들은 한국군의 요청으로 되돌아갔다.
김민석 대변인은 18일 “사고 현장에는 공군의 C-130 수송기를 비롯한 다수의 구조헬기가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로서는 미군 헬기의 역할이 많지 않아 일단 복귀하도록 하고 추가로 임무를 주겠다고 지시를 했다”고 밝혔다. 16일자 성조지는 “익명을 요구한 한국 해군 관리는 미군의 추가 지원을 요청하기 전에 사태 추이를 지켜보는 중이라고 말했다”는 보도를 했다. 아브라함슨 대변인은 “한국과 논의를 했고 요청이 오면 지원하기 위해 대기중이다”고 밝혔다.
한 마디로 한국군이 먼저 지원 요청을 하고서 정작 헬기가 도착하자 할 일이 없다며 되돌려 보낸 것이다. 물론 11시 18분 경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하면서 시호크 헬기가 할 일이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군 구조헬기를 충분히 운영하고 있었기에 돌려보냈다는 발표와 모순이 된다. 한국군이 수색·구조 작업을 충분히 잘 하고 있었다면 미군의 지원이 필요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한국군은 해경과 함께 세월호 완전히 침몰한 후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하지 못했다.
본험 리처드호는 다음날인 17일 오전에도 시호크 헬기 두 대를 투입해 생존자 수색에 나섰다. 아브라함슨 대변인은 한국의 요청에 따라 사고 지점에서 약 5~15해리(9~28km) 떨어진 구역을 수색했다고 하면서 왜 그 구역 수색을 요청했는지 모른다고 밝혔다. 아마도 조류에 떠내려간 생존자를 수색한 것으로 보인다. 대잠헬기인 시호크를 동원했다고 해서 잠수함을 수색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결국 본험 리처드호는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하고 세월호 참사 지점에서 약 20~25해리(37~46km) 떨어진 곳에 머물다가 22일 진도 해역을 떠난다. 미 해군 7함대 공보실은 4월 23일자 보도자료를 통해 “한국이 보유한 선박과 항공기 등 현재 자원을 활용하면 수색 및 구조 작업을 하는데 충분하다는 한국군 지휘부의 결정에 따라 본험 리처드호가 탐색구조 임무에서 벗어나게 됐다”고 밝혔다. 대체 한국군 지휘부 누가 한국 자체로 충분하다고 판단했을까?
본험 리처드호 수색 지원 과정에서 드는 의혹의 핵심은 왜 지원 요청을 하고서 그냥 돌려 보냈는지다. 보도를 종합하면 한국 측은 본험 리처드호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해 시간만 보내다가 주변 해역 수색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주변 해역 수색도 필요하지만 당시 가장 시급한 것은 침몰하는 세월호에 탑승한 수백 명의 승객을 구조하는 것이었다. 그냥 우왕좌왕하면서 어쩔 줄 몰라 돌려보낸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 수밖에 없다.
세월호가 침몰한 그 날은 공교롭게도 한미연합 공군 전투탐색구조훈련이 진행되고 있던 날이었다. 매년 퍼시픽선더니 사렉스(SAREX:한미일 합동해상구조훈련)니 하는 탐색구조훈련을 하면서 정작 구조를 해야 하는 실제 상황이 되면 아무런 판단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이유가 뭔가. 훈련을 잘못 해서인가, 한국군의 수준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과정에서 밝혀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