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성, 나의 고향은
나의 고향은 공간 속에 있지 않고
머나먼 시간 속에 있다
어린시절 부르던
흘러간 노래 한 소절과
그것이 떠올리는 시간
아득히 먼 별에 숨어 있는 한 송이 꽃처럼
믿을 수 없는 기억 속에
윤은경, 용서
오래, 용서라는 말을 배웠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써 보질 못했다
어떻게 쓰는 건지
그 많은 연습과 실습으로도
쉽게 익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백지 한 장을 앞에 두고
열심히 쓰고 또 지운다
용서라는 말
내뱉으면 바로 산산이 부서져
바람 속에 흩어지는 말을
서안나, 슬픔이 삼켜지는 방식
우리는 한 문장 안에서도 자꾸 어긋났다
나는 칼처럼 외로웠고 세상은 혼돈이었다
나는 초록으로 몸을 틀어 당신에게 닿는다
그렇게 내가 꽃으로 피거나, 당신이 어두워졌다
꽃이 핀다는 건
세상에 없는 목록을 느린 필체로 적어보는 것
우리는 상처 속으로 별처럼 흩어졌다
고요의 처음을 지긋이 바라보는
당신의 옆얼굴
마음의 눈동자를 거두어 들여
나는 당신에게로 흐를 것이다
마음이라는 말이 있어 비극은 탄생했다
신은 더욱 비굴해졌고
사랑 안에서 우리는 눈이 아팠다
당신
나는 자주 물고기처럼 두 눈을 뜨고 잠이 들었다
조용미, 젖은 무늬들
당신의 어깨 위에도 내 머리카락에도
안개는 뭉클뭉클 섞여
안개 속에서 우리는
허무와 피로를 극복하는 법을 오래도록 생각한다
비와 안개가 출렁이는 우기의 마지막 하루
노각나무 흰 꽃들
바닥에 떨어져 뭉개어지고 있다
비에 젖고 발에 밟혀 파묻히는 흰 빛들
물끄러미 바라보는
젖은 무늬들
머리 위에 맺혀 있는 한 방울의 구름
손바닥 안 한 줌의 모래
당신과 나는 천천히
안개 속을 걸어 내려온다
보이지 않는 빛들이 당신과 내 몸에 묻어있다
김인희, 꽃의 고요
자신의 생을 요약한
색과
형태와
향기가
벌레에게 먹히지 않도록
기도해본 적 없다 꽃은
그 몸에 수없이 상처를 입히는 벌레들에게도
항거해 본 적 없다 꽃은
자신을 해석해 줄 모든 해석자들이 사라져도
아파해 본 적 없다
웃기만 하는 꽃
이유 없이 밟히면서도
하얗게 웃고만 서 있는 꽃은
자신의 생에 대한 해석을 원해 본 적이 없다
저 꽃
자신을 피워 준 그 꽃나무 지키며
그냥 그저 그 광야 지나가는 쓸쓸한 바람의 친구로 서 있다
자신의 품을 떠난 시간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길목에 하얗게 웃고 서 있다
꽃은 생의 가장 높은 곳에 피는 것
자신을 피운 그 꽃나무 밑에
색을 묻고
향기를 묻고
형태를 묻고
그저 고요히 웃고만 서 있다 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