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지금까지도 청해수산에서의 일화는 잊지 못 한다.
대형 식당 주방은 마치 금형품을 찍어 내는 공장과도 같다.
주방 경력이 없는 초짜들은 주로 스끼다시를 만드는 일을 하는데,
짬밥마다 각각 맡은 파트가 있고 어느 정도 짬이 차면 그 위에 일을 하게 된다.
노동의 양은 위로 갈수록 더 많아지고 인간이 과연 이정도의 노동을 버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처음 맡았던 일은 숙소에서 내려가자마자 아침을 먹고 지하 창고에 있는 냉동실에서 개당 15킬로 정도 나가는
꽁치를 20박스 꺼내어 1층 주방에 올린 뒤 큰 다라에 찬물을 받아 모두 해동했다.
꽁치가 상할까봐 한겨울에도 찬물을 사용해야 했고 면장갑을 낀 손으로 동상 걸리기 직전까지
꽁치를 일일이 떼어내며 뭍은 비늘이나 피 같은 것들을 새척했다.
그리고 지하 냉장실에서 개당 20킬로 가까이 나가는 홍합 포대기를 10개 정도 갖고 와서
역시 찬물에 새척했고, 해동 된 꽁치 수백 마리를 야끼바라는 기계로 구웠다.
하루 평균 수백상이 나가는 곳이라 한상에 하나씩만 잡아도 기본 500마리는 나가는 곳이었고
꽁치랑 홍합 뚝배기는 추가 요청하는 손님이 많아서 어쩔 때는 700마리씩 굽고 홍합탕을 700개는 퍼야 했다.
오전에는 동상 걸릴 것 같던 손이 오후쯤 되면 반쯤 익어 있었다.
조수도 없이 그 모든 걸 혼자 홀과 연결되어 있는 다이위로 날라야 했고 저녁이 되면 단 1초도 쉬지 못 했다.
밤 10시쯤 되면 시마이라는 것을 하는 데, 피로가 극에 달해 있는 몸으로 모든 장비들을 새척하고 바닥을 쓸고 닦고
위에 형님들 눈치를 보며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더 이 악물고 노력했다.
일단 야끼바를 삼 개월 동안 마스터 하면 그다음이 전, 찜 다이(테이블)였다.
전, 찜 다이는 역시 아침 일찍 지하창고에 내려가 내 몸 상체만한 호박을 10개 정도 들고 껍질 벗기는 칼로
모든 호박의 껍질을 벗긴 뒤 썰고 밥그릇을 이용해 씨를 빼고 대칼로 호박을 깍두기 크기로 동강을 낸다.
초반엔 호박하나 껍질 다 벗기는 데 한 시간이 걸려서 형님들께 국자로 얻어맞기도 했고
형님들은 실장님들에게 깨질까봐 나를 도와주곤 했다.
어느 정도 요령이 생기니 10분이면 호박하나 해체를 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동강난 호박은 대형 믹서기로 갈아서 즙 같은 형태의 반죽으로 만들었다.
그 호박즙에 설탕과 부침가루, 밀가루를 혼합해서 호박전을 만들 수 있는 재료로 만들었다.
저녁이 되면 6개의 미니 후라이팬으로 수백 개의 전을 부쳤고 한치라고 하는 물회 비슷한 스끼다시도 내가 만들었다.
찜은 가오리 찜인데 펼치면 내 키보다 더 큰 냉동 가오리 20마리를 해동 시키고,
대칼로 동강을 내서 아가미를 뜯고 콧물처럼 묻어 있는 찐득한 액체를 씻어 냈다.
그 것을 6단 찜통 두 개로 쉴 새 없이 쪄내어야 한다.
무게도 엄청나서 당시 50킬로를 겨우 넘긴 나로선 너무 벅찬 일이었다.
초반에는 전을 부치는 시간이 너무 걸려서 욕도 많이 먹었다.
나중엔 요령이 생겨 작은 국자 하나로 후라이팬에 전을 펼치는 데에 3초도 안 걸렸고,
순식간에 6장 모두 펼쳐 불 위에 올린 뒤 가오리 찜 6개를 뜨고 한치 6쟁반을 만들고 뒤 돌아보면 딱 전이 반쯤 익어 있었다.
6개 모두 뒤집고 찜과 한치를 나른 뒤 돌아오면 반대편도 다 익어 있어서
쟁반에 덜어 낸 뒤 나르는 숙달력을 보였다.
원래 전, 찜다이는 두 명이 하던 곳인데 이 모든 걸 혼자 다 해내니 실장님들과 형님들이 나를 높게 평가 하셨다.
저녁이 되면 형님들이 도와줄 여력이 없어서 밀리는 순간 주방장님과 실장님들의 독설을 들어야 했고
너무 못하는 경우 짤리는 경우도 있었다.
오갈 데 없던 나는 깡다구로 버텼고 몇 달 만에 결국 전, 찜 다이도 통과했다.
극한의 상황은 인간이 가진 능력을 최대치에 최대치를 발휘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스끼다시의 꽃 해물다이에 서게 된다.
해물은 종류만 기본 15가지 이상이었고 거의 모든 재료들이 냉동식품이었다.
오전에는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냉동품을 찬물로 해동했고 반 이상의 재료들은 조리를 해야 했다.
해물 다이를 거치는 시간이 가장 길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일단 종류가 자주 바뀌었고
(주방장님이나 실장님이 다른 가게에서 눈으로 훔쳐오는 경우가 많았다.)
조리법도 수시로 바뀌어서 숙달할 시간이 적었다.
기본 한 상에 해물 하나가 나가는 데 해물 한 접시를 만들려면 손이 적어도 백번은 왔다 갔다 해야 완성이 된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것이었고 미적 감각도 필요했으며 무엇보다 청결이 가장 우선이었다.
여름에는 수시로 재료들 상태를 확인해야 했고 조금이라도 냄새가 나면 주방장님은 해물 접시를 집어 던지셨다.
그때는 무서웠고 원망했지만 지금은 그 분을 이해한다.
해물 다이에서 일식에 관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해물 다이 전에 철판 다이라는 곳도 거쳤는데 이 곳은 철판 세장에 하나는 조리된 콘을 올려서 끓이고
하나는 은행과 팽이 버섯을 올려서 튀기고 나머지 하나는 냉동 장어를 소스와 함께 조리했다.
당시 나는 홀에서 일하던 내 또래 애들과 친하게 지냈었는데 주방장이나 실장님이 없을 때 여자 애들에겐
콘을 만들어 줬고 남자 애들에게는 쓸데도 없는 놈들에게 장어를 만들어 줬다.
당시 난 머리를 많이 길러서 뒤로 묶고 요리사 모자를 쓰고 일했었는데
친구들은 내가 처음에 여자인줄 알았다고 해서 내 이름 뒤에 순을 붙여 X순이 X순이 부르고 다녔다.
열 받았지만 나중엔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또 몇 달이 흘러 생선을 잡는 다이를 맡게 되었다.
여태 모든 일들이 힘들었지만 이 생선 대가리 따는 일은 정말 지옥이었다.
하루에 천 마리 이상의 생선 대가리를 따고 내장을 꺼내어야 한다.
우럭 가시에라도 찔리는 날에는 손가락이 엄지발가락 만해지고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잔다.
하루 일과가 끝이 날 즈음에는 주위에 온통 피로 가득한 곳에서 생선 시체들에 파묻혀 있는 나를 보곤 했다.
살면서 그토록 많은 살생을 해보았을까.
그 뒤로 지금까지 난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도 안 밟아 죽인다.
작은 우럭은 단칼에 죽였지만 덩치가 큰 1미터 정도 되는 점성어(홍민어)나
그보다 약간 작은 농어 같은 경우는 잘 죽지도 않고 힘도 좋아서 야구 방망이로 기절을 시킨 뒤 잡곤 했다.
죽어가는 그 큰 눈을 보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주방의 2인자 간데기 라는 곳을 맡게 된다.
간데기는 매운탕을 끓이는 곳인데 하루 평균 매운탕 500개
오전에는 식사탕 300개를 끓이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곳이었다.
그 곳은 원래 내가 싸부라고 부르던 형님이 하던 곳인데 내가 물려받아서 그 일을 하게 된다.
싸부는 정말 간데기에서 날라 다니던 신선 같은 존재였다.
나만큼 마른 몸으로 손이 안보일 정도로 매운탕을 끓였고 그 모습은 모든 다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물론 월급도 가장 많이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실장님들이 계시던 앞다이 빼고.
오전에는 야채들과 육수를 끓이고 오후에는 매운탕 500개 분량의 생선뼈를 잘라서 큰 다라에 뼈를 씻어야 한다.
말이 씻는 것이지 말 그대로 세탁기처럼 빨아낸다.
정말 힘든 일이다.
탕 하나하나에 모든 간이 다 맞아야 하고 밥을 먹지 않아도 항상 배가 불러 있다.
조금 요령이 생기면서 다데기 뜨는 양과 국물 색으로 판단해서 더 이상 간을 안 봐도 될 정도가 되었다.
당시에는 다른 식당에 가서 매운탕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 후 10여 년 동안 매운탕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앞다이를 제외하고 경력이 가장 높은 사람만 했던 오로시 다이에 서게 된다.
오로시는 생선을 해체하고 껍질을 벗기는 작업이다.
굉장히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고 실제로 주방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이기도 하다.
오로시 기술이 매출과 직관되기 때문이다.
같은 생선을 잡아도 경력이 높은 사람이 하면 한 점이라도 더 나오고
청해수산처럼 하루 천 마리가 넘는 생선을 잡는 곳이라면 그 차이는 더 커진다.
오로시 다이는 기술을 요하는 곳이었고 거기서 일하던 형들은 모두 목과 어깨에 담을 안고 살아야 했다.
하루 종일 한 곳에서 극도로 신경을 써가며 똑같은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이라 겉으로는 편해 보여도
실상 그곳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죗값을 치루고 있는 악인들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몇 달 뒤 2002년 월드컵이 찾아 왔고 나는 도박에 손을 대게 되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