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얼굴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세상 끝에 편의점이 있다니
무엇을 팔까
장화를 팔까
얼음 가는 기계를 팔까
이 여름 냄새를 팔까
여즉 문을 닫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야겠으니
생각나는 한 사람 얼굴을 그려달라고 해야겠으니
도화지가 있느냐 물어야겠다
사람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 하니
주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얼굴 그림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그 그림이 나의 얼굴이거나
혹은 한 사람의 옆얼굴이어도
얼은 영혼이란 뜻이라니
굴이라는 말이 길이라는 뜻이라니
세상 모든 나머지를 파는 편의점에 가서
조금만 틈을 맞추고 와야겠다
세상 끝을 마주하다가 낯을 씻고
아주 조금만 인사를 하고 와야겠다
진은영, 그 머나먼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 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박복조, 부부 일식
멀리서도 해가슴을 베어먹은 달이
스며들어 해 한쪽이 사라졌다
저 모두어 안으려는
패여진 상처를 봐라
제 몸을 베어주고 그만큼 넓어진 남은 한쪽
작아져서 더욱 힘차게 껴안은
순한 그림이다
온전히 밝음을 내어준 흔적
달아난 빛만큼 넉넉하구나
한 두어 평 그늘진
그리움으로 달이 밝다
정복여, 안절부절꽃
내 방에 동백이 오셨다고 전화를 한다
남쪽엔 벌써 피었다더라
그 옆에 철쭉도 오셨다 전화를 한다
요샌 아무 때나 철쭉은 피는데 뭐
꽃들이 서랍에서 스위치서 리모콘에서
저것 봐, 달그락 피어나는 싱크대
그랬으면 그랬지라는 말을
시큰둥한 자루에 꽁꽁 묶어넣으며
별일 없지?
세상은 바쁘다고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백성이 하나뿐인 나라
그가 바로 나인
단 한명의 백성을 위하여 여왕들은 그렇게 왔다 간다
꽃을 접는 잎 속에 다시 일년치의 새 규율이 있다
지켜도 지켜도 아무도 모르는 생일처럼
커튼이 베란다문이라도 열어두라 눈 흘긴다
짧은 바람이 여행객처럼 왔다 가지만
배낭이 그 시큰둥한 자루를 닮아 있다
김두안, 계단 하나
할머니 한 분
육교 계단을 내려온다
한 손에 지팡이
다른 손엔 가방을 움켜쥐고
계단 모서리 밀고 당기며
엉덩이 끌고 내려온다
가을 햇살도
난간 쇠 파이프 그림자도
구불구불 주름 잡힌 계단
할머니 한 분
온몸
접었다 폈다 조용히 내려온다
계단을 내려설 때마다
무릎 꺾고
허리 접어
육교를 간신히 밀어내듯
계단이
계단을 주름잡고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