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락, 고요의 입구
개심사 가는 길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
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
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개심(改心)하였을까
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평심(平心)의 바닥
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
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떤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저 고요의 영역 표시
경계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심(放心) 뒤에 진저리 치던
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
하물며 개심(開心)이라니
그 구멍의 뿌리 모두 바닥에 닿아 있으므로
길은 불평의 바닥이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하지 말자
눈이 내렸을 뿐 나는 아직 고요의 입구에 있는 것이다
조재훈, 어느 계산
너에게서
나를 빼면
낮달이다
낮달에다 나를 보태면
바다다, 떠도는 섬이다
나에게 너를 보태면
꽃이다. 꽃에다 너를 보태면
화염이다, 불타는 벼랑이다
너를 나에게
나를 너에게
곱할 수도 나눌 수도
없는 저녁
눈물이 고인다
박철, 한 마리 낙타가 되어
나도 누군가의 꿈에 한번쯤은 나타났겠다
전혀 예기치 않게 한 마리 낙타가 되어
무심히 사막을 건너고 있었겠다
그도 나처럼 일어나 여명에 기대어
이유 없이 먼 사막에 골몰했겠다
만남이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닌 것
그저 사람 사이에 흐르는 향기와 같다
먼 이역을 떠돌 사람과 꿈속에서 옛이야기를 하다가
울컥하여 잠에서 달려나오니
눈물도 사람의 것이 아닌 듯 숨죽이며 흐르고
결국 세상을 이토록 아름답게 채우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눅진 냄새이려니
너와 나 그런 향기를 지닌 채
멀리 한평생 살다 가기도 했겠다
고증식, 달 때문에
추석날 밤
고향집 마당에 앉아
오래 전의 그 둥근달 보네
달빛 동동주 한 잔에
발갛게 물든 아내가
꿈결처럼 풀어놓은 한 마디
지금 같으면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울컥
하마터면
다 털어놓을 뻔했네
이진수, 비 온 뒤
길을 가다 보면
푸른 것들이
발 걸 때 있다
제 삶의
밑바닥을 딛고
환하게 솟은 것들이
나보다도
내 절망을 향해
발을 걸어 와
오히려 하루 종일
넘어지고 싶은
그런 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