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나는 태어나자마자 당시 18세였던 어머니라는 사람에게 버림 받았다.
아버지는 나를 울산에 있는 할머니께 맡기고 고려아연이라는 중금속 회사에 다니며
생계를 유지하셨고 매달 생계비를 지원하셨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 내내 할머니를 도와 매주를 만들고, 산나물을 뜯어서 시장에 내다 팔았고,
빈병을 수거해 생필품을 사고, 매일 밤새도록 생밤을 까고,
학교 앞에서 설탕과 소다로 똥과자를 직접 만들어 하나에 30원씩 50원씩 받고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한 번씩 친구들이 멀리서 똥과자를 사러 오는 게 보이면 창피해서 골목 안으로 도망을 쳤고,
빈병을 구루마에 실어서 슈퍼에 갖다 줄땐 행여나 친구들을 만날까 밤 늦은 시간을 활용하여
수십 번이고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번 돈 삼사만원으로 생필품을 샀고 과자를 사먹는 일이라고는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내게는 큰아버지들이 다섯 분 계시는데 그중 제일 큰아버지는 원양어선의 주방장이셨고
할머니와 내가 지내는 바로 옆방에서 지내셨다.
큰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세 명 있었는데, 그 중 막내형이 나와 같이 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훗날 내겐 은인이 된다.
그리고 큰형과 둘째형은 나와 원수가 되며 인연을 끊게 된다.
큰아버지는 심한 알콜 중독에 몇 달에 한 번씩 집에 오셨고 오실 때마다 나를 때리시고
물건을 던지며 할머니께 행패를 부렸다.
마흔이 다 돼가는 지금도 내 뒤통수가 좀 심하게 짱구인데 그때의 손 지검으로 인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민학교 시절 내내 단벌 신사였고 내 옷에는 늘 독한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당시 할머니는 지독한 흡연가셨고 담배도 늘 독한 장미, 도라지, 백자, 청자 이런 것들만 피우셨다.
학교에선 선생님께 불려가 어린놈이 벌써부터 담배를 태우냐고 혼이 난적도 많았고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하면 할머니가 오셔서 사정을 설명하며 진을 빼곤 했다.
내 첫사랑이었던 짝지(짝꿍)에게는 늘 미안했고 창피했다.
아버지는 대학 졸업식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학교에 오지 않으셨다.
운동회 때도 그랬고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 친구들은 부모님과 김밥을 먹을 때
난 운동회 도중에 집까지 뛰어가서 할머니와 점심을 먹고 다시 혼자 오곤 했다.
반찬은 늘 멀건 김칫국에 콩나물 무침이었다. 지금은 그 맛이 그립지만 당시는 살기위해 먹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아버지 또한 친어머니 만큼 어리셨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 했다.
할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철이 빨리 든다는 게 맞는 것 같다.
남들과 조금 다른 어린 시절을 보내며 가족의 정 같은 건 전혀 느껴보지 못 했고
친구들이 공부하며 뛰어 놀 땐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부자가 돼서 더 이상 빈병 따위는 줍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국민학교 3학년이 되었다.
십년 만에 친어머니라는 사람이 다시 아버지를 찾아왔고
아버지는 그 사람을 받아주며 할머니 밑에 있던 나를 다시 데려 갔다.
그리고 정확히 일 년 만에 그 사람은 우리를 다시 떠났고 나는 할머니에게 돌아갔다.
훗날 들은 얘기로는 친엄마라는 사람은 나를 낳고 서울로 도망가서 바로 딸을 두 명을 더 낳았는데
그 딸 또한 버리고 다시 아버지를 찾아 온 것이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분노하며 어떻게 자식을 그렇게 두 번씩이나 버릴 수 있냐고
짐승이냐고 꾸짖으셨고 친엄마는 나를 또 버리셨다.
그로부터 27년간 단 한 번의 소식도 접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
한겨울에 속옷만 입고 찬물을 뒤집어 쓴 채 마당으로 쫓겨 난 적도 있고
반찬투정을 한다며 이틀씩 굶기는 건 예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내가 들어서는 바람에 본인 인생이 꼬여서 내게 화풀이 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이코패스가 아니었을까 하는...
그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안 나고 별로 생각나지도 않지만
내 이복동생이 되는 그 아이들은 가끔씩 궁금해 하기는 한다.
지금은 그가 밉다기 보단 아주 조금은 이해를 하려고 노력은 한다.
그래도 내 생에 딱 한 번은 그 사람을 만나 볼 생각이다. 그 사람 장례식장에서...
이미 돌아가셨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암울했던 국민학교 시절을 거치고 중학생이 되었다.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만나셨고 할머니 집 근처로 이사하신 뒤 나를 부르셨다.
할머니는 내가 중2때 치매가 찾아와 반년을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영안실에 있던 할머니 시신을 보며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 아프게 울었다.
할머니는 내게 어머니 이상의 존재였고 최고의 스승이었다.
울음을 참으려 피가 배일 정도로 볼을 깨물었다.
훗날 나의 최고 관심분야가 될 최초의 죽음을 목격했던 때이기도 하다.
중금속 중독 땜에 고려아연을 그만두고 택시 기사 일을 하던 아버지는 위암에 걸리시고 얼마 없던 재산을 다 날리셨다.
보험 하나 안 들었던 아버지 잘못이 크다.
다행이 택시회사 사람들이 한푼 두푼 모은 성금으로 아버지를 살리셨다.
당시 도와주신 분들은 훗날 내가 은혜를 갚을 것이다.
중, 고등학교 시절 내내 새어머니에게 제대로 된 도시락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6년 동안 맨밥과 김치만 싸주셨고 김치를 남겨 오면 굉장히 화를 내셔서
늘 남은 김치는 집 근처 하수구에 버리곤 했다.
학교에서 책 위에 동전을 놓고 하는 판치기와 짤짤이를 해서 딴 돈으로 늘 컵라면을 사서 밥을 말아먹곤 했다.
훗날 알게 되지만 이때부터 도박에 소질을 보였던 것 같다.
고등학교는 스쿨버스를 이용했는데 거리가 멀어서 왕복 네 시간 거리였다.
하루 네 시간씩 스쿨버스 안에서 친구들과 섯다를 했고 그렇게 딴 돈으로 군것질을 했으며
동네 친구들과 모여 처음으로 술을 마시기도 했다.
할머니 때문인지 담배는 지금까지도 피우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친어머니였고 그 다음이 담배냄새였다.
주말이나 방학이면 늘 막내형을 도와 샷시 제작과 시공 알바를 했다.
아무런 안전장비 없이 고층 아파트 난간에 배를 걸치고 밧줄에 묶인 샷시 틀과 유리를 맨손으로 당겨 올렸다.
진짜 미친 짓이었다. 요즘은 스카이나 사다리차로 올리지만 그때는 다 밧줄로 해결했다.
당시는 사람이 많이 죽어 나갔다.
요즘도 가끔 고층 작업 할 때 스카이나 사다리차가 쓰러져 인명 사고가 나는 걸 목격하곤 한다.
그걸 생각하면 그때는 정말 미친 짓이었구나 생각한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살아온 인생의 반은 비교도 안 될 고달픈 내 인생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