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신, 플랫이 있는 창
노을을 머리로 그려보는 저녁이다
성당의 돌기둥
색유리의 반짝임
노을이 쌓이고 모래바람이 분다
분수대 광장에 앉아 랭스턴 휴즈의 시 몇 줄을
나에게 던져보는 저녁
수은등이 켜진다
신발을 잃어버리고 울었던 밤
사방에서 파편들이 반짝였다
손가락 사이로 핏덩이들이 튀어 오른다
교통사고는 아닌 것 같아
마우스에 얹은 손등 위로 퍼지는
오르간의 선율
그 선율에 담겨 있을 노을
노트르담의 돌기둥
시월의 소네트
어떤 눈동자에 마음 베이는 저녁이다
당신을 만나 볼 것 같은 저녁
내 몸에서 시멘트 냄새가 난다
이제인, 내부 수리 중
옷장을 정리한다
하나씩 다시 입어 보며 버릴
이유를 생각한다
그럴만한 변명들이 팽팽하게 맞서는
미처 끊어내지 못한 내 연애처럼
버리기도 두기도 어렵다
설레지 않는 헌 애인 따위는
진작부터 버렸어야 했다고
너무 늦은 거라고, 하지만
지금이라도 마음 다져먹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잘 붙어 있는 단추 하나까지
트집잡아 보지만
옷장을 정리할 게 아니라
시든 꽃줄기에 붙어 있는
네 마음의 가랑잎부터 먼저 뜯어내 보라고
몇 년이 지나도 늙지 않는 꽃무늬들
능청능청 흩날린다
한때 서로 가슴 젖도록 닿았던
단단한 기억들, 어느 기억인들 가벼울까마는
소중했던 것일수록 더욱 낡아 있는 옷장
옷장은 아직 정리되지 못했다
삶의 내부 수리중에 있는
사십 중반무렵
박시하, 오래된 새장
한쪽이 무거워진 새장은 기울어 있다
문은 닫혀 있고 열쇠는 반짝이지 않는다
낡은 철장에 푸른 번개가 치면
숨은 장소들이 삐걱삐걱 나타난다
뼛조각들을 희미하게 드러내며
별들의 어둠을 이어 붙인다
부유한 어제는 죽었다
가난한 내일이 홰를 친다
우리는 낮에만 태양이 타오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밤에만 별이 빛난다고 믿는다
너에게 나는 빛나고 있니?
빛나는 건 모두 멀리 있니?
우리는 말이 새어나올까 봐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잠이 든다
우리의 귀는 새를 닮아 있고
심장은 새장 모양이다
새장을 열고 날아간 새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서하, 바코드
없는 것이 없는 대형 할인마트,
사람들은 제 몸보다 큰 손수레 앞세우고
구름처럼 부풀 샴푸와 세제, 커피, 라면을 주워담는다
몇 개의 질문들을 얼기설기 싣고
계산대 앞에 서서 대답을 듣는다
라면, 샴푸, 커피 줄줄이 갖다 대기만 하면 답을 한다
계산원이 문득 무녀(巫女)처럼 보인다
언젠가 대나무가 멀뚱멀뚱 꽂혀있는
역술인 집에 친구와 함께 간 적이 있다
그녀는 내 몸 어딘가에 숨어있는 바코드를 읽은 것일까
열린 편지처럼 나를 읽어낼 동안
내 몸은 헐거운 문자가 되었겠지
그윽한 시선으로 산비탈처럼 기울어진
나의 가계를 일렬횡대로 불러 세운다
내 안의 뿌리와 산맥들
이 길일까 저 길일까 헤매이며
더러운 손으로 몇 번이나 하늘을 만지려 했는지
우물 옆 감나무 밑에 누워 입만 벌리고 있었는지
감겼던 태엽을 술술 풀어낸다
그녀의 눈이 내 몸을 빠져나간다
중요한 건
내가 나를 한 번도 제대로 읽어 본 적 없다는 거다
통유리 밖으로
어두워지기 전 낯부터 붉히는 하늘이 보인다
거기 저무는 태양이 바코드처럼 붙어 있다
이구락, 강가에 앉아
강물은 제 홀로 흘러가고
강가의 숲은 그림자만 강물에 흘려보내고
백리 밖 그림자도 몰래 훔쳐 흘려보내고
모래무지 꼬시래기 버들치 홀로 한가로우니
아, 물결처럼 한쪽으로 흐르는 내 마음
강가에 앉아 나도 내 마음
뚝 뚝 떼어 흘려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