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봉, 나뭇잎의 말
바람 불고 어둠 내려서 길 잃었네
나무야, 너는 굳센 뿌리로 대지를 움켜쥐고
팔 들어 별을 헤아리겠지만, 나는
네 뿌리 밑으로 노래의 씨를 묻는다네
길 잃은 슬픔 너무도 오래 사랑하여
슬픔이 한 꽃송이로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나는
외로운 시간 너무도 오래 사랑하여
슬픔이 한 꽃송이로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나는
나무야, 네 뿌리 밑으로 별의 푸른 밝음을 묻는다네
영영 결별 없는 사랑이 되기 위해
언 땅 위에서 아직도 집 짓지 못한 벌레의 집이 되고
동행 없어 외마디 비명으로 죽어 가는 바람의 친구가 되고
나는 이제 예감의 숲에
아프고 환한 노래의 씨를 묻는다네
김두안, 입가에 물집처럼
달이 뜬다
해도 지기 전에 뜬다
나는 어둠이 보고 싶어
내 어두움도 보일 것 같아서
부두에 앉아 있는데
달이 활짝 뜬다
달빛은 심장을 욱신거리게 하고
희번득 희번득 부두에 달라붙고 있다
아 벌리다 찢어진 입가에 물집처럼
달빛은 진물로 번지고 있다
달은 어둠을 뻘밭에 번들번들 처바르고 있다
저 달은 환하고도
아찔한 내 안에 근심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초병에게 쫓겨가는
통제구역인 것 같아서
나는 캄캄한 나를
어떻게든 더 견뎌 보기로 한다
서하, 말
실수로 밀어버린 소주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쨍그랑
한 마디 한다
채우면 비우고
비우면 채우는 일
이력이 나서일까
그 한 마디가
그의 한 평생이다
뱁새는 둥지 트는데
나뭇가지 하나면 된다는데
생각해 보니 술잔 들고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나
취해서 중얼거린 말들
도대체 알 수 없고
빈 술병이 도리질하며 운다
이구락, 흐린 날은
흐린 날은 추억이 잘 보인다
흔들리며 지워지는 모든 것들
자알 보이는 흐린 날은
흐린 날의 그리움 흐린 날의 시장끼 넘어
수미산 맑은 그늘로 가는
키 낮아진 추억 하나
더욱 잘 보인다
흐린 날은 바람도 추억 쪽으로 흐르니
세상은 문득 아득하여
오래오래 저문다
문정영, 듣는다는 것
비 고인 곳은 낮은 자리다
조금 높은 곳은 마르고
약간 낮은 곳은 젖어 있다
고여 있는 뒤안길 걸어가면서
나는 조각하늘과 나무눈과
지는 꽃잎 이야기를 듣는다
고인다는 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듣는다는 것이다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비의 소리 담가 두면
어느 사이 잔잔해진다
그 때 들으면
비의 음절 하나하나가 보인다
본다는 것도 듣는다는 것이다
비가 묻혀온 세상 듣는 것이다
하늘이 내는 소리도 거기 속한다
나무나 꽃도
낮은 자리에서 들으면 들린다
길도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