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이슬
처마 아래 달빛이 겹으로 쌓이고
이슬도 두텁게 주렴을 드리우네
바로 한 걸음 앞에서, 너는
나를 볼 수 있을까
이슬의 주렴을 슬쩍 건드려도
길은 어디로나 열려 있고
벌써 여러 번 계절이 왔다 가는데
최호일, 엑스트라
이 한여름에
두꺼운 옷을 껴입고 우리는 웃는다
여름날 당신의 입술과 내 손가락 사이로 내리는
눈송이들
혀가 혀를 빨아 먹으며
바위 사이에서 커다란 뱀과 여자와 허벅지가 튀어 나올 때
주인공은 홀로 용감하다
대기 속에는 진짜 총알이 들어 있고
여섯 시에 총을 맞아야 하므로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내일은 지퍼가 열린 줄 모르고 들고 다니는 트렁크 속에서
가면과 시체가 쏟아질 것이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영화처럼
저녁이 오고
화면엔 보이지 않지만 쓰러진 술잔이 있다
그것이 어두운 소리로 굴러 떨어져 강가에 닿을 무렵
겨울이 와야 한다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내 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이시영, 내가 언제
시인이란,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우주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언제 나의 입김으로
더운 꽃 한 송이 피워 낸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눈물로
이슬 한 방울 지상에 내린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손길로
광원(曠原)을 거쳐서 내게 달려온 고독한 바람의 잔등을
잠재운 적 있는가 쓰다듬은 적 있는가
이기인, 밥풀
오늘 밥풀은 수저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풀은 그릇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그릇엔 초저녁 별을 빠뜨린 듯
먹어도 먹어도 비워지지 않는 환한 밥풀이 하나 있네
밥을 앞에 놓은 마음이 누룽지처럼 눌러앉네
떨그럭떨그럭 간장종지만한 슬픔이 울고 또 우네
수저에 머물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이 저녁의 어둠
이 저녁의 아픈 모서리에 밥풀이 하나 있네
눈물처럼 마르고 싶은 밥풀이 하나 있네
가슴을 문지르다 문지르다 마른 밥풀이 하나 있네
저 혼자 울다 웅크린 밥풀이 하나 있네
조재훈, 낮달
굶다가 병들어
숨 거둔 어린 동생
빈 산 비탈에 묻고
묻힌 눈물 죄다 삭은 뒤
캥캥 여우 울음 따라
허옇게 억새꽃이 날렸다
울음 끝에 숨죽인
울엄니 낮달이
가만히 동치미국물 한 사발 들고
열뜬 머리맡에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