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자, 무릉역
무릉으로 간다
측백나무 숲을 지나
수밀도 우거진 복숭아밭을 꿈꾸며
매표창구도 없는 비둘기호만 몇 차례 기적 울리는
텅 빈 구석진 땅, 무릉역
내 시름이 발길 따라 내린다
역무원 대신 차가운 바람이 떨며
낯선 이방인을 쓸쓸히 따르고
가로등은 뿌옇게 젖은 눈빛이다
시든 꽃대궁 마른 바람에 위태로운 길
팽팽한 평행선 철로를 벗어나
무겁던 걸음 휘적휘적 달빛강 헤친다
내게 오래 서성이던 미련은 그림자 따라 흔들리고
지친 발 밤이슬이 묻어
허겁하여 달아나는 휑한 가슴까지 천천히 적신다
아
일상의 탈출을 꿈꾸며 흔들리던 열차의 몸부림도
은밀하게 키워온 화려한 꿈도
한 걸음 나서면 이렇게 허허벌판인 것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물에
어제 본 달이 또 빠진다
한선향, 하얀 밤이 나를 번식시킨다
밤이 하얗다
나를 박차고 달아나는 밤은 대낮처럼 하얗다
무수히 뒤척일 때마다 버석거리는 밤은
다른 나를 수없이 번식시켜 왕궁을 짓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며 장미꽃이 되었다 나비도 되었다
카멜레온처럼 몸 바꾸는 나
여러 개의 얼굴 뒤에 숨어
여러 개의 풍경 속에 나를 분산시킨다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는
불면의 유충들, 애벌레들, 나비들
증오하면서도 가면의 춤사위를 즐기고 있는 나
하얀 밤이 나를 자꾸 번식시킨다
안오일, 낯선 신발과 함께
아무리 찾아봐도 내 신발이 없다
식당 안, 남아 있는 누군가의 신발 한 켤레
가만히 발 집어넣어 보는데
남모를 생이 기록된 이 신발은 도통 낯설다
몇 걸음 걸어보지만
모양도 크기도 다른 시간
자꾸만 벗겨져 헛발을 짚는다
오랫동안 잊고 살던 내 발의
생김새와 버릇이 떠오른다
신발 속에는 그 사람의 굴곡이 있다
서로를 맞춰간 침목 같은 시간으로
동행이 되어준 신발,
발을 꼼지락거려보니
내 발만 놀고 있는 것인데
낯선 신발의 완고함은
내 걸음마저도 바꾸려고 한다
이면우, 오늘, 쉰이 되었다
서른 전, 꼭 되짚어 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리고 만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도 아는 체했던 모든 책들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가 속맘으로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소리 내어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자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며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는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 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다
권정우, 변산에서
바닷가에 와서 보니
해는 매일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우리의 하루와
한 생도
몸을 낮출수록
더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