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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밤이 하얗다
게시물ID : lovestory_855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40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5/28 18:06:26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new

BGM 출처 : https://youtu.be/h_nkv7xYbGI





1.jpg

권순자무릉역

 

 

 

무릉으로 간다

측백나무 숲을 지나

수밀도 우거진 복숭아밭을 꿈꾸며

 

매표창구도 없는 비둘기호만 몇 차례 기적 울리는

텅 빈 구석진 땅무릉역

내 시름이 발길 따라 내린다

 

역무원 대신 차가운 바람이 떨며

낯선 이방인을 쓸쓸히 따르고

가로등은 뿌옇게 젖은 눈빛이다

시든 꽃대궁 마른 바람에 위태로운 길

팽팽한 평행선 철로를 벗어나

무겁던 걸음 휘적휘적 달빛강 헤친다

내게 오래 서성이던 미련은 그림자 따라 흔들리고

지친 발 밤이슬이 묻어

허겁하여 달아나는 휑한 가슴까지 천천히 적신다

 

일상의 탈출을 꿈꾸며 흔들리던 열차의 몸부림도

은밀하게 키워온 화려한 꿈도

한 걸음 나서면 이렇게 허허벌판인 것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물에

어제 본 달이 또 빠진다







2.jpg

한선향하얀 밤이 나를 번식시킨다

 

 

 

밤이 하얗다

나를 박차고 달아나는 밤은 대낮처럼 하얗다

무수히 뒤척일 때마다 버석거리는 밤은

다른 나를 수없이 번식시켜 왕궁을 짓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며 장미꽃이 되었다 나비도 되었다

카멜레온처럼 몸 바꾸는 나

여러 개의 얼굴 뒤에 숨어

여러 개의 풍경 속에 나를 분산시킨다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는

불면의 유충들애벌레들나비들

증오하면서도 가면의 춤사위를 즐기고 있는 나

하얀 밤이 나를 자꾸 번식시킨다







3.jpg

안오일낯선 신발과 함께

 

 

 

아무리 찾아봐도 내 신발이 없다

식당 안남아 있는 누군가의 신발 한 켤레

가만히 발 집어넣어 보는데

남모를 생이 기록된 이 신발은 도통 낯설다

몇 걸음 걸어보지만

모양도 크기도 다른 시간

자꾸만 벗겨져 헛발을 짚는다

오랫동안 잊고 살던 내 발의

생김새와 버릇이 떠오른다

신발 속에는 그 사람의 굴곡이 있다

서로를 맞춰간 침목 같은 시간으로

동행이 되어준 신발,

발을 꼼지락거려보니

내 발만 놀고 있는 것인데

낯선 신발의 완고함은

내 걸음마저도 바꾸려고 한다







4.jpg

이면우오늘쉰이 되었다

 

 

 

서른 전꼭 되짚어 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리고 만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도 아는 체했던 모든 책들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무슨 일로 다투다가 속맘으로 낼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소리 내어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자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그 어린 게 날 부축하며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쉰이 되었다,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는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 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다







5.jpg

권정우변산에서

 

 

 

바닷가에 와서 보니

해는 매일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우리의 하루와

한 생도

몸을 낮출수록

더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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