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흠, 귀가 서럽다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백우선, 나무의 지도
한 그루의 나무를 아는 데에도
수만장의 지도가 필요하구나
손바닥만 한
오만 분의 일 지도
이어지고 이어지는
생명 입자들의 길
네게로 가는 길도
다 들어 있구나
이만섭, 부드러운 칼
사과를 깎다 보면
과도의 예리한 날이 육즙을 즐긴다
칼은 한 마리 활어처럼
스륵스륵 과육 사이를 헤엄쳐 다니고
은근히 피워내는 사과 향기
주변이 오롯하다
제 몸 베이면서도 어느 한 곳
상한 데 없는 사과의 짜릿한 비명이
환하고 둥글게 피어난다
상큼한 맛을 즐긴 칼은
이윽고 사과의 몸을 빠져나와
포만감에 겨운 듯 소반 위에 드러눕는다
꽃 핀 자리처럼
눈부신 사과의 속살 지어놓고
달콤한 육즙에 젖어
자르르 윤기 흐르는 과도의 날
그 견고한 부드러움
장석남, 동지
생각 끝에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간다
언 내(川) 건너며 듣는
얼음 부서지는 소리들
새 시(詩) 같은
어깨에 한 짐 가져봄직하여
다 잊고 골짜기에서 한철
일어서 남직도 하여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오는 이 또 있을까
꽝꽝 언 시 한짐 지고
기다리는 마음
생각느니
천양희, 문장들
당신은 어떻게
관악산이 웃는다고 쓰고
가지가 찢어지게 달이 밝다고 쓸 수 있었나요
개미의 행렬을 지켜보면서
인생은 덧없다고 쓸 수 있었나요
음악은 고통 받는 영혼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쓸 수 있었나요
당신은 또 어떻게
나무에는 강렬한 향기가 난다고 쓰고
꽃이 구름처럼 피었다고 쓸 수 있었나요
삶을 그물이라고 쓰고
환상이 삶을 대신할 수 없다고 쓸 수 있었나요
당신은 다시 어떻게
환상도 사실이라고 쓰고
가난도 때로는 운치가 있다고 쓸 수 있었나요
자기 자신이 인도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고 쓰고
당신의 의지가 당신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쓸 수 있었나요
당신의 문장들에 많은 빚을 졌다고
나는 쓸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