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운명
당신
거기서도 보이십니까
산산조각난 당신의 운명을 넘겨받아
치열한 희망으로 바꾸어온 뜨거운 순간을
순간의 발자욱들이
보이십니까
당신
거기서도 들리십니까
송곳에 찔린 듯 아프던 통증의 날들
그 하루하루를 간절함으로 바꾸어
이겨낸 승리를
수만 마리 세떼들 날라오르는 날개짓같은
환호와 함성 들리십니까
당신이 이겼습니다
보고싶습니다
당신때문에 우리가 아팠습니다
당신 떠나신 뒤로 야만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어디에도 담아둘 수 없는 슬픔
어디에도 불지를 수 없는 분노
촛농처럼 살에 떨어지는 뜨거운 아픔을
노여움 대신 열망을
혐오 대신 절박함으로 바꾸며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해마다 5월이 오면
아카시꽃 하얗게 지는 5월이 오면
나뭇잎처럼 떨리며 이면을 드러내는 상처
우리도 벼랑끝에 우리 운명을 세워두고 있다는 걸
당신도 알고 계십니까
당신의 운명으로 인해
단순간에 바뀌어 버린 우리의 운명
고통스런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지금 우리
역사의 운명을 바꾸고 있습니다
시대의 운명을 바꾸고 있습니다
타오르되 흩어지지 않는 촛불처럼
타오르되 성찰하게 하는 촛불처럼
타오르되 순간순간 깨어있고자 했습니다
당신의 부재
당신의 좌절
이제 우리
거기 머물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루지 못한 꿈
당신이 추구하던 의롭고 따뜻하고 외로운 가치
그 이상을 그 너머에 별을
꿈꾸고자 합니다
그 꿈을 지상에서 겁탁의 현실속에서
이루고자 합니다
보고싶은 당신
당신의 아리고 아프고 짧았던 운명때문에
많은 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보이십니까
당신이 이겼습니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우리들이 우리들이 이겼습니다
유시민, 대답하지 못한 질문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나라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시대가 와도 거기 노무현은 없을 것 같은데
사람 사는 세상이 오기만 한다면야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요?
2002년 뜨거웠던 여름
마포경찰서 뒷골목
퇴락한 6층 건물 옥탑방에서 그가 물었을 때
난 대답했지
노무현의 시대가 오기만 한다면야 거기 노무현이 없다한들 어떻겠습니까
솔직한 말이 아니었어
저렴한 훈계와 눈먼 오해를 견뎌야 했던
그 사람의 고달픔을 위로하고 싶었을 뿐
대통령으로서 성공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개인적으로 욕을 먹을지라도
정치 자체가 성공할 수 있도록
권력의 반을 버려서 선거제도를 바꿀 수 있다면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요
대연정 제안으로 사방 욕을 듣던 날
청와대 천정 높은 방에서 그가 물었을 때
난 대답했지
국민이 원하고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시지요
정직한 말이 아니었어
진흙투성이 되어 역사의 수레를 끄는 위인이 아니라
작아도 확실한 성취의 기쁨에 웃는 그 사람을 보고 싶다는
소망이었을 뿐
세상을 바꾸었다고 생각했는데 물을 가르고 온 것만 같소
정치의 목적이 뭐요
보통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지켜주는 것 아니오
그런데 정치를 하는 사람은 자기 가족의 삶조차 지켜주지 못하니
도대체 정치를 위해서 바치지 않은 것이 무엇이요
수백 대 카메라가 마치 총구처럼 겨누고 있는 봉하마을 사저에서
정치의 야수성과 정치인생의 비루함에 대해 그가 물었을 때
난 대답했지
물을 가른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셨습니다
확신 가득한 말이 아니었어
그 분노와 회한을 함께 느꼈던 나의
서글픈 독백이었을 뿐
그는 떠났고
사람 사는 세상은 멀고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들은 거기 있는데
마음의 거처를 빼앗긴 나는
새들마저 떠나버린 들녘에 앉아
저물어 가는 서산 너머
무겁게 드리운 먹구름을 본다
내일은 밝은 해가 뜨려나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나는
아직 대답하지 못한 질문들을 안고
욕망과 욕망이
분노와 맹신이 부딛치는 소리를 들으며
흙먼지 날리는 세상의 문턱에 서성인다
정희성, 봉화산
당신 떠난 그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당신 떠난 그 자리에
사람들이 서성이며 울고 있습니다
아아 천둥번개 비바람 지난 뒤에도
당신 떠난 빈자리에
사람들은 숲이 되어 서 있습니다
박노해, 우리는 바보와 사랑을 했네
오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웁니다
기댈 곳도 없이 바라볼 곳도 없이
슬픔에 무너지는 가슴으로 웁니다
당신은 시작부터 바보였습니다
떨어지고 실패하고 또 떨어지면서도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 살 수 있다고
웅크린 아이들의 가슴에 별을 심어주던 사람
당신은 대통령 때도 바보였습니다
멸시받고 공격받고 또 당하면서도
이제 대한민국은 국민이 대통령이라고
군림하던 권력을 제자리로 돌려주던 사람
당신은 마지막도 바보였습니다
백배 천배 죄 많은 자들은 웃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고, 저를 버려달라고
깨끗하게 몸을 던져버린 바보 같은 사람
아, 당신의 몸에는 날카로운 창이 박혀 있어
저들의 창날이 수도 없이 박혀 있어
얼마나 홀로 아팠을까
얼마나 고독하고 힘들었을까
표적이 되어, 표적이 되어
우리 서민들을 품에 안은 표적이 되어
피 흘리고 쓰러지고 비틀거리던 사랑
지금 누가 방패 뒤에서 웃고 있는가
너무 두려운 정의와 양심과 진보를
두 번 세 번 죽이는 데 성공했다고
지금 누가 웃다 놀라 떨고 있는가
지금 누가 무너지듯 울고 있는가
“당신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인생을 사셨는데”
“당신이 지키려 한 우리는 당신을 지켜주지도 못했는데”
지금 누가 슬픔과 분노로 하나가 되고 있는가
바보 노무현
당신은 우리 바보들의 ‘위대한 바보’였습니다
목숨 바쳐 부끄러움 빛낸 바보였습니다
다들 먹고사는 게 힘들고 바쁘다고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타협하며 사는데
다들 사회에 대해서는 옳은 말을 하면서도
정작 자기 삶의 부끄러움은 잃어가고 있는데
사람이 지켜가야 할 소중한 것을 위해
목숨마저 저 높은 곳으로 던져버린 사람아
당신께서 문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그리운 그 음성으로 말을 하십니다
이제 나로 인해 더는 상처받지 말라고
이제 아무도 저들 앞에 부끄럽지 말라고
아닌 건 아니다 당당하게 말하자고
우리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처럼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향해
서로 손잡고 서로 기대며
정직한 절망으로 다시 일어서자고
우리 바보들의 ‘위대한 바보’가
슬픔으로 무너지는 가슴 가슴에
피묻은 씨알 하나로 떨어집니다
아 나는 바보와 사랑을 했네
속 깊은 슬픔과 분노로 되살아나는
우리는 ‘바보’와 사랑을 했네
이희정, 나는 지금 가난합니다
우리도 지금 가난합니다
당신의 착한 얼굴로
서로의 가난을 위로했는데
지금은 다시
가난한 한 영혼을 위해
울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우리의 핏줄이었기에
인권, 그것이 우리의 살결이었기에
목숨으로 대처하신 당신
서둘러 가신 뜻 무엇이기에
흐르는 눈물로도 부족함니까
이제 산안개로 풀어져서
괜찮다, 괜찮다 하실 당신
불두화 핀 오월의 들녁에서
이제 몸 아프지 않아도 될 당신
작은 비석으로 앉아
당신을 위해 우는 가슴들을 어루만져주실 당신
미안해 하지마
원망도 하지마
당신의 고운 말 세상이 됩니다
당신의 설운 말 역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