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그전에 몸이 많이 아픈 사람이
꼭 새벽으로 전화했다
너무 아파서
시인과 이야기 하고 싶다고 했다
한두 해 지나자 전화가 끊겼다
늘 죽고 싶다던
그 사람 죽었을까
털고 일어났을까
몇 년째 감옥에 있는 사람이
꽤 오래 동안 시를 써 보내왔다
시가 늘 부끄럽다고 했는데
마음의 알몸 같은 거
눈물 같은 거였다
사람이 살다가
누구에겐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몇 사람이라도 꼭 들어줬으면 하는 말이
시라면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권순자, 어머니의 새벽
죽천 바닷가
어머니의 새벽은 싱싱하다
밤새 파도가 토해다 놓은 미역, 곤피
여명에 건져 올리는 손
울컥대는 갯내음을 달게 마시며
탱탱해지는 어머니의 가슴은
새벽안개에 젖은 꿈으로 붉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깡마른 몸이 지게차처럼 함지박을 옮긴다
나날을 조이는 삶의 그물을
날렵하게 빠져 나오는 새벽마다
어머니 발걸음은 생선 지느러미보다 활기차다
한 꾸러미 옭아매던 근심들이 달아난다
짠내와 비린내가 어머니의 속 깊은 물결에 밀려난다
아직 기울지 않고 조각달 희미하게 떠 있는
읍내로 나가는 골목
해산물 냄새 퍼트리며
소리 없이 밝은 아침이 되시는 어머니
윤희상, 화가
화가는
바람을 그리기 위해
바람을 그리지 않고
바람에 뒤척거리는 수선화를 그렸다
바람에는 붓도 닿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바람은 보지 않고
수선화만 보고 갔다
화가가 나서서
탓할 일이 아니었다
오철수, 당신에게
겨울이 와도
당신에게 들려줄 노래 없네
그저 평범하게 사십을 살고
이제 여행이나 떠났음 좋을
며칠이 남았을 뿐
화사하게
난 당신에게 들려줄 꿈도 없네
출근하고 퇴근하고 얼굴 마주치면
좋지도 싫지도 않게 그저
빙긋 웃을 밖에
할 말 없네
이제 내 상상은 월급 봉투처럼 너무 평범해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네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던
기다림의 긴긴 하루 없네
사람이 살던 곳에서 그저
당신을 사랑했던 기억과 아이들 얼굴
잊지 못할 몇 개의 추억만 담아 갈
맑아진 웃음밖엔
참으로 섦지도 않네
당신을 사랑하네, 졸다가 오간 말처럼
김기택, 꼽추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슴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