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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 잘하는 사람'
우리는 대부분 사회생활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가 마냥 생각처럼 돌아가지는 않는다. 학창 시절에 절대 배우지 않는 것이, 아니 절대 보편적으로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 사회생활이기에 처음 사회에 진출한 모든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멘붕에 빠진다.
어린 시절 나는 프로게이머를 꿈꾸며 17살이란 나이에 아마추어 합숙소에서 단체생활을 시작했다. 첫 사회생활을 그때 시작한 것이다. 물론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어린 나이부터 합숙을 하다 보니 나이가 많은 형들 앞에서 개인적인 감정 따위 챙길 겨를도 없었다. 심지어 내가 생활하던 그 숙소에는 정상인보다 비정상인이 훨씬 많았기에 말 그대로 카오스였다. 나는 그 혼돈 속에서 사회를 배워갔다.
어떤 형은 새벽마다 술을 마시고 와서 자고 있는 동생들을 괴롭히기도 했고,
어떤 정신 나간 형은 한 달간 안 씻어서 새까매진 발바닥 사이를 긁어보라 시켰고,
또 다른 누군가는 "부산 사나이"를 외치면서 소주병을 들고 동생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에서도 나는 저항 한 번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다들 그걸 견뎌내는 게 올바른 사회생활이라고 말을 해왔으니까, 나도 그게 정답인 줄만 알았으니까.
언젠가 참다못해 어떤 형에게 한 번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정작 용기를 낸 나에게 돌아온 것은 싸가지없다는 비난과 손가락질이었다. 부조리에 맞서 싸운 대가는 문제아라는 꼬리표뿐. 그 이후로 나는 정상인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감정을 철저히 숨겨야 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때부터 나는 부조리한 사회 분위기에 서서히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까 그 이상한 형이 “이제 사회생활 좀 하네", "성격이 좋아진 거 같네" 이런 말을 해주면 그저 좋다고 웃던 나였다. 비정상적인 그 형에게 내가 완벽히 길들여진 것이다. 말 그대로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하지 못한 채 적응해버린 모습이다. 현실적으로 저항하면 할수록 더 피곤해지니까.
당시에 나는 이렇게 감정을 숨기고 비위를 맞춰주는 행동이 사회생활을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무렵 나와 동갑인 친구가 한 명 들어왔다.
형들이 아무리 뭐라 해도 대꾸조차 안 하던 한 친구. 어느 순간에는 주먹다짐까지 갈뻔할 정도로 저항하던 그 친구. 처음엔 친구인 나조차 무척 거슬렸다. 왜 저렇게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까.
아니나 다를까, 어느 순간 형들은 그 친구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 친구가 정말 안타까웠다. 무시를 당하니까.
그래서 형들은 나랑만 친하게 놀았다. 뭘하든 나에게만 관심을 줬고, 가끔 과하게 장난을 치더라도 괴롭히는 게 아니라 애정의 표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친구는 이런 애정의 표현조차 못 받는 걸 보며 너무나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성숙한 사회를 경험하다 보니 불쌍한 건 그 친구가 아니라 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당시에 나도 알았던 거 같다. 다만 스스로 아닐꺼야라며 애써 위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튼 그렇게 프로게이머를 은퇴하고 사회로 나온 당시에도 나는 여전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생활 잘하는 것은 남 눈치 잘 보고 감정을 최대한 잘 숨기며 비위를 잘 맞춰주는 사람이다.
사회활동을 하며 만난 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매사에 제멋대로였다. 자기 기분이 안 내키면 위아래 없이 막말을 일삼고, 막상 본인한테 그렇게 대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기죽여놓는 스타일. 즉 내로남불의 전형이었다. 나는 도저히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회생활 정말 개판으로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사람이 너무나 싫었지만, 한 편으로는 부러움도 생겨났다.
내가 똑같이 행동하면 싸가지 없는 사람이 되고,
그 친구는 오히려 그렇게 행동하면 쿨하고 당찬 사람이라 봐주는 아이러니한 상황.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
열 번 잘해주던 사람이 한 번 못하면 나쁜 사람이 되지만,
열 번 못하던 사람이 한 번 잘하면 알고 보니 착한 사람이 되는 현상.
이 말처럼 처음부터 자기주장을 잘 하고 권리를 챙기는 사람들은 당장은 미움을 받을지라도, 어느 순간 조금만 잘해줘도 남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하지만 애초에 감정을 잘 숨겼던 사람은 어느 순간 한 번만 화를 내도 "쟤 갑자기 왜 저래?"같은 냉소적인 시선을 받는다.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회생활 잘하는 게 남 비위 잘 맞춰주는 거는 아닌 거 같다. 물론 그 사람처럼 막말을 내뱉는 거도 아닌 거 같다. 이와중에 하나 배운 것은 적어도 저 사람은 괜히 나처럼 쓸데없는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아주 가끔은 저 사람이 부럽다.
어차피 이래 욕먹나, 저래 욕먹나 한다면
차라리 귀막고 그 사람처럼 속편히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요즘처럼 욕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도,
아무 말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분을 삭이는 나를 마주할 때만큼은.
출처 | http://brunch.co.kr/@youthhd/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