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수박
작년 여름에도 그랬었다
매연 자욱한 버스정류장에서
테레사를 닮은 아주머니는 신문을 팔고
아이들은 고가도로 밑에서
런닝셔츠 바람으로 자전거를 탄다
생선냄새 비릿한 서울시장 입구
딸기아저씨 리어카에는
얼룩말이 낳은 알처럼
둥그런 수박들이 가득하다
골목길 막다른 집 홍제옥
과부댁은 자식들과 모여 앉아
커다란 수박을 단숨에 먹어 치우고
다시 헛헛한 땀을 흘리며
개장국을 끓이기 시작한다
작년 이 무렵에도 그랬었다
새로운 여름은 오지 않고
밤에도 깊어지지 않고
변함없는 여름만 가버린다
네모난 수박이 나올 때까지
돌아갈 집도 없이
여름은 언제나 이럴 것인가
고재종, 설움에 대하여
적으나 많으나
한솥밥 먹던 자식들
혹은 제 잘난 생각 따라
혹은 제 양 적어 싸우는 나날이 싫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그 한솥밥 삶던 검은 가마솥
시방은 새암가에 나앉아
말간 뜨물이나 받고 빗물이나 받고
밤이면 그 위에 별빛이나 띄우는
그 녹슨 가마솥을 보고
먼 산으로 고개 드는 늙은 여인을 보았다
지붕 위에 박꽃이 하얗게 벙근
추석이 가까워지는 지난 밤
유순예, 다래끼
알약 몇 알로 날 보낼 생각은 접어주시게
자네 속눈썹 뿌리에 세균처럼 스며들어
며칠만 묵었다 가면 그만이네
눈두덩이 벌겋게 부어오르도록
봐야 할 사람이 누구냐고
전하고 싶은 말이 무어냐고
캐묻지도 말아주시게
고름처럼 왔다가 고름처럼 살다 간 사람 여기 있다고 말한들
알아줄 이 누가 있다고
냉랭한 가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후한 가슴 만났을 때
허락도 없이
며칠만 투정부리다 가면 그만이네
끙끙거리다 곪아터지면 그만이네
육도를 헤매다 온
뜬것의 속내 삭혀준
자네
자네 왼손에 연꽃 피네
알약 몇 알로 날 잡을 생각은 접어주시게
최문자, 염색
색깔도 뿌리를 갖고 있네
서로 부둥켜안는다고 물들지 않네
누가 누구를 염색했다는 말
한꺼번에 지문이 사라지는 일이네
사람은 살갗이 아니네
역사와 또 다른 하늘이 있네
푹푹 삶아도
구름은 폐기되지 않네
불온한 물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처들어오네
얼굴은 젖지만
하늘은 적시지 않네
딱, 한 번 참으로 위험했었네
갈기갈기 실뿌리까지 찢으며
막무가내로 물들고 싶은 적이 있었네
자욱한 물감이 밀려와 무릎뼈에 고일 때
흰 뺨에 뜬 붉은 구름
아프게 문질러도 지워지는 건 아주 조금이었네
하나의 영혼이 하나의 영혼 속으로 염료가 드나들었다는 말
가장 외로운 일이네
가끔씩 그에게
황홀한 색깔을 빌려오는 나
순백의 양말을 벗어놓는 일이네
물들어 보일까봐 눈을 꼭 감네
박남희, 햇빛은 송곳이다
지상에는 뚫을 것이 너무 많다
꽃도 뚫고
바람도 뚫고
이슬도 뚫고
흙도 뚫고
뚫고
뚫고
뚫고
더 뚫을 것이 없이 모조리 뚫고
다 뚫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그 생각까지도 뚫고 뚫는 것은
송곳이다
그런데 사실
송곳이 뚫은 건
흙도 아니고
이슬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꽃도 아니고
꽃대궁이 버리고 간 허공이다
허공이 송곳에 뚫릴 때마다
없는 꽃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