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평론가협회(아래 '영평')이 지난 9일 정기총회를 갖고 공석 중인 회장에 조혜정 중앙대 예술대학원 교수를 선출했다. 직전 회장이 논란 끝에 선출된 지 8개월 만에 낙마해 어수선한 분위기였던 영평이 그간의 혼란을 뒤로하고 추슬러지는 모습이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급속히 보수적 색채가 강화된 모습에서 탈피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앞서 영평은 지난해 2월 김병재 평론가를 회장으로 선출했으나 국회에서 김 평론가가 영진위의 의뢰를 받아 대필 기고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논란에 휘말렸다. 김병재 평론가는 영진위가 부산국제영화제 예산 삭감으로 인해 영진위가 비난을 받던 시점에서 언론 기고를 통해 정치적 보복 의혹을 제기하는 억지 의견을 밝혔다.
그런데 이 기고가 영진위의 요청으로 문체부 등과 논의했고, 영진위가 초안을 쓴 사실이 국회에서 드러난 것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수의 회원이 김 회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자 지난 11월 초 시상식이 열린 영평상 수상작 심사에 불참을 선언하면서 압박했다(관련 기사 : 영평상, <남한산성> 작품상... '대필기고' 논란 회장은 사퇴).
영평상이 파행 위기로 치닫자 김 전 회장은 임시총회를 소집해 참석 회원들의 재신임을 얻은 직후 자진사퇴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하지만 당시 임시총회에 참석했던 23명의 18명이 재신임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영화계에서는 부적절한 행동을 옹호한 평론가들은 도대체 누구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영평은 그간 행보가 영화계의 분위기와는 동떨어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부산영화제 탄압에 맞서 영화계가 구성한 비상대책위에 참여했다가 회장이 바뀌면서 빠져나오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이 블랙리스트 등을 앞세워 자행한 영화계를 탄압하는 과정에서도 방관하는 자세를 취해, 은근히 옹호한다는 인상을 비췄다. 최근 영평 회장들 중에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친화적인 인물이 많았다. 일부 인사들은 주요 기관장 후보에 지원하거나 거론되기도 했다.
부산영화제 예산 삭감 때 유일하게 '반대 목소리'
이 같은 논란을 뒤로하고 새롭게 회장에 선출된 조혜정 교수는 여성영화인모임 이사와 영진진흥위원회 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영상자료원 이사, 영화교육학회 회장, 가톨릭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영화기관과 단체에서 주요 역할을 맡아 왔다.
영화기관의 주요 자리에는 주로 이명박 정권 초기와 후반기에 임명됐고 그 기간 중 활동이 두드러졌다. 영화계 일각에서는 이명박 정부 시절 영화기관의 주요 직책을 맡은 것에 대해 대해, 조 교수의 부군이 이명박 정권에서 공정거래위원장과 국세청장을 지내며 실세로 부각된 백용호 현 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교수라는 점과 연관 짓는 시선도 있다.
따라서 보수적 인사들이 잇따라 회장에 선출되고 있는 영평이 최근 수년 동안의 흐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보수 정권 당시 스크린독과점 문제와 독립영화 탄압 등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영화단체들과 연대했던 모습을 되찾기는 간단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일부 젊은 평론가들은 영평을 탈퇴하거나 거리를 두겠다는 의중을 나타내고 있다.
다만 조혜정 교수는 대필 기고 의혹을 받아 물러난 전임 김병재 회장이 옹호했던 2015년 부산영화제 예산 삭감 당시 삼사위원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으나, 이 과정에서 다른 행보를 보인 점은 영화계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다.
당시 청와대와 문체부를 통해 부산영화제 정치적 탄압이 결정된 상태에서 조 교수는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일방적 예산 삭감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당시 회의록에는 정권의 방침을 대변한 다른 심사위원들과는 달리 부산영화제에 12억 이상을 지원해야 하고 남는 영화제 예산을 불용처리하려는 방향을 지적하는 조 교수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조 교수는 "저런 식으로 심사위원이 구성된 줄 알았으면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영평의 한 관계자는 조 교수의 회장 선출에 대해 "이전 집행부가 회원들의 동의 없는 정관 개정으로 직선제를 무력화시킨 것을 무효화하고 원상회복시킨 부분은 의미 있게 평가한다"며 "40명에 가까운 회원이 참여해 2표 정도의 기권을 제외하고 압도적인 찬성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어 "원로평론가들이 일찍부터 조 교수를 회장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일부 회원은 "박근혜를 몰아냈더니 이명박 쪽 인사가 된 모양새"라며 불편함을 내비쳤다.
조 교수는 보도자료를 통해 "평론의 전문성과 다양성 확보로 영화평론가협회 활성화에 힘 쏟겠다"면서 "여성평론가들을 중심으로 성평등 관점의 평론도 확산시키겠다"는 각오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