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정, 침묵을 버리다
난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가 좋더라
욕설 같은 바람이 얇은 옷을 벗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앞쪽은 젖은 옷처럼 찰싹 붙고 그 뒤쪽은 불룩하게 헐렁한
마음이 바람의 날을 벼리고 있잖아
절규하며 날뛰는 힘을 견디며 파랗고 날 샌 노래를 부르잖아
봐, 깊게 사랑했던 마음이 들끓을 때
당신은 울음소리에 몰두할 수 있지
당신이기에 어느 한 가슴이 가장 먼저 울 수도 있지
내가 알았던 세상의 모든 길을 지우고
다시 당신이라고 불렀던 사람이여
저기 망망대해를 펼쳐두고 출렁임을 그치지 않는
당신의 침묵이 폭풍우가 되는 바다가 참 좋더라
폭풍우에 스민 울음소리가 들리잖아
나를 부르는 웃음소리가 들리잖아
마음이 바람의 날을 세워 밀며 밀리며 견디는
저 애증의 극단 중간에 침묵을 두고
세상이 되고 길이 되었던 당신이 가슴으로 와서
폭풍이 될 때 나는 휘몰아치는 바다가 좋더라
김상미, 우울증 환자
그는 지독한 우울증 환자
의사가 준 알약을 먹고
자신만이 아는 길을 향해 떠난다
그 길에 한 번도 들어서보지 못한 이들은
지옥처럼 불타고 있다고 말하는 그 길을
가끔은 꿈속에서처럼 그와 마주칠 때가 있다
상심의 지렛대 위에 정다운 얼굴들을 올려놓고
그 끝에 앉아 아슬아슬 웃고 있는 듯한
그럴 때마다 손 내밀어 같이 놀아주고 싶지만
그는 지독한 우울증 환자
입속으로 무수한 알약을 털어 넣으며
몸 안에 있는 창이란 창은 모조리 잠그는 사람
아무리 그에게 이쪽으로 오라, 이쪽으로 오라 소리쳐도
따뜻하고 포근한 솜이불 대신
싸늘한 북풍을 여행가방 가득 쑤셔 넣고
심연에 그어놓은 무수한 골목길을 따라
언제나 자신에게서 먼 곳으로, 먼 곳으로만 떠나는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로 아름답게 접히는 부분
아무리 그에게 보여주고 입혀주어도
불 꺼진 지하처럼 유독한 마음 안에 모조리 찢어 넣고
그는 간다, 가고 또 간다
언제나 똑같은 자리
자신을 가두고 또 가두었던 끝없는 고통 속
새카만 우울 곁으로
권선희, 아내의 서랍
일요일 아침
아내는 목욕탕 가고
밖엔 비 내린다
손톱깎이 하나 처박힌 곳 모르는
내 집이 낯설다
서랍 안에 서랍이 있다
내심 뒷돈이라도 꼬불처둔 것이기를 바라며
서랍을 연다
십 년이 된 크리스마스카드
첫차 구입 영수증
군복무 확인서와 해약한 적금통장
마른 오징어처럼 쩌억 눌러 붙어있다
제 꿈을 옳게 꼬불치지 못하고
아내는
내가 훌훌 벗어던진 것들만
주워 담고 살았구나
드응신
손톱깎기도 전에
살점을 뜯겼다
아내 슬리퍼가 빗소리를 끌고 온다
떨어진 마음 한 점
얼른 서랍 속에 넣고 돌아앉는다
박정원, 잠자는 자전거
그가 지나온 길들이 나무에 기대어 있다
왼쪽은 위로 오른쪽은 아래로 향한 페달
밟으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내
힘을 밭여주던 체인도 털털거리며 달리던 바퀴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혼자 힘으로 결코 나아갈 수 없는 페달처럼
낭떠러지 직전에 멈춰버린 브레이크처럼
위태로운 발자국들 그림자들
수많은 정차, 왼발 오른발 무릎을 꺾었던 경계선 끝에
룰루랄라 달리던 시간들도 얼기설기 비친다
사내가 부린 짐들도 비켜서 있다
어깨를 내어준 나무가
오르내리던 길에서 만난 응달까지도 불러와
고요히 토닥이고 있다
저러고 싶을 때가 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누군가에게 기대어
깨워도 일어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기지개를 켜고 스스로 걸어 나갈 때까지
마냥 지켜보고 싶은 풍경을 영원히
덧칠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조창환, 수평선
수평선
몸 열지 않는다
바라보고, 바라보고, 바라보아도
수평선, 몸 열릴지 않고
단단한 잠이 깊은 침묵을 품고 가라앉을 뿐
가시 많은 선인장처럼 바다는 견고해지고
굵고 튼튼한 등뼈 너머 이상한 춤
지느러미 흔들며 깊은 잠 속으로 사라진
깃털에 싸인 손자국들
병아리 숨소리 같은 저녁 빛 번져올 때
한 삶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
꿈속에 만난
녹슨 등장 같은 시간의 찌꺼기들
몸 열지 않는 수평선 저 너머로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수평선
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바라보고, 바라보고, 바라보아도
몸 열리지 않는
허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