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1주일 마다 하나씩 연재하고 있네요.
지난편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921767&s_no=921767&kind=search&search_table_name=humorbest&page=1&keyfield=subject&keyword=%EC%88%98%ED%95%99안 읽으신 분들은 참고하세요.
이번 시간은 일제 강점기 부터 이어간다고 했는데
지난 시간(2부)에 적었던 내용 마지막 부터 이어갈게요. 오해할만한 부분이 있어서...
세도 정치기에 수학이 쇠퇴했다고 했었는데, 이 기간에 아예 수학이 버려졌냐... 하면 그런건 아닙니다.
꾸준히 연구 되고, 수학책도 나왔습니다.(지난 시간에도 말했다시피 중인계층이 세습화 되어 버리다 보니...)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로 최한기(조선말 유명한 실학자이죠), 남병길, 이상혁 등이 있구요.
단지 시기가 시기이니 만큼 세도 정치기라는 시기가 학문보다는 권력에 싸바싸바~ 하는 시기이다보니 위축되었을꺼라 추측하여 그렇게 적은것입니다. (수학사를 전공하신 김용운 교수님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갖고 계신 듯 합니다.)
그러니 완전히 끊어졌다가 다시 연구가 이어졌다. 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이제 3부를 시작할까 하는데... 3부로 끝내려다가 근현대사에 대해서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2부처럼 길게 써볼까 합니다.
3부로 끝내겠다고 해놓고는 4부나 5부에서 끝나겠네요~;; 자꾸 늘여서 미안합니다. (--)(__)
우리 역사를 좀 더 잘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중간 부분을 늘리다보니... 양해 좀 해주세요.
오늘 내용은 수학과/수학교육과 학생일지라도 처음 접하는 내용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어려운 부분은 없으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읽어보세요.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 하는 분들은 이상구 교수님의 '한국 근대수학의 개척자들' 이라는 책을 읽어보세요. 아마 제가 지금 쓰고 있는 글보다는 조금 덜 매끄럽겠지만, 충분히 읽어볼만 할거에요. 212쪽에 정가 12,000원. 부담 없죠?
자, 이제 진짜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쓰겠습니다.
1883년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사립학교인 원산학사에서 천문, 지리, 전기 등의 과목을 비롯해 산법과 대수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으로 일반 대중에게 수학교육의 문이 열렸다고 했죠?
이후 배재학당(1885년), 이화학당(1886년) 등 연달아 사립학교(학당)들이 생겨났고,
1886년 9월 대한제국 정부도 '육영공원' 이라는 근대식 관학 교육기관을 만들어 정치,경제,수학,영어 등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한편(그러나 이후 정부의 재정압박으로 운영이 어려워져 영어 교육만 담당하는 기관으로 개편됩니다)
1887년 전문수학자 관료인 산학자의 선발이 폐지되고,
1895년 교육조서를 발표에 이어, 한성 사범학교(수업 연한 2년의 교사 양성학교) 관제, 외국어학교관제, 성균관관제(경학과에서 산술학과 신설), 소학교 령(소학교는 현재의 초등학교) 등을 연달아 공포하면서 학교 교육 속의 수학(산술)을 전면적으로 유럽식으로 개편합니다.
이 시기의 수학 교재 중 일부. 국권피탈전까지 50여종 이상의 수학책이 발간되었다 합니다.
출처 :
http://www.sciencetimes.co.kr/?news=우리나라-수학교육-100년의-교훈소학교령에서는 수학교육의 목표 및 내용을
“일용계산을 익히고 동시에 사상을 정밀히 하고, 유익한 지식을 주는 것을 요지로 삼는다. 심상과(3년제)에서는 처음에 10 이하의 수에서 시작하여 1만 이내의 범위에서 가감승제와 통상 소수를 교수하는 것이 가하다. 심상과에서는 필산과 주산을 행하지만 그 병용은 지역의 사정에 의해서 정한다.
고등과(2년제)에서는 필산과 주산을 병용하고 주산에 있어서는 가감승제의 연습, 그리고 필산에서는 도량형․화폐․시각에 관한 계산문제로부터 점진하여 간단한 비례문제와 통상의 분수 및 소수를 교수하지만 수업연한에 따라 더 복잡한 비례문제까지 취급하여도 가하다. 산술의 교수는 이해력을 정밀히 하고 운산(運算)에 익숙하여 그것을 자유로이 응용할 수 있도록 힘쓰고, 또 정확한 말로 운산의 방법과 이유를 설명하고, 겸하여 암산에도 숙달하게 함을 요한다.”
와 같이 규정하고 있으며, 정선산학의 서문에는
“산학을 배우는 목적이 반드시 격물치지(格物致知) 하는 것이니 진실로 격물치지 하려면 산학을 놔두고 무엇을 가지고 하겠는가?"
라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로 수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도 을사늑약(1905년) 등을 거치며 국권이 피탈되면서, 우리의 수학 교육은 참담한 시기를 겪게 됩니다.
전통 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고취시키고, 고등교육을 철저히 배제하는 한편 저급한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목표였던 조선총독부는,
조선 유일의 국립대학이었던 성균관을 당연히(?) 폐지하며(1911년 경학원으로 대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리저리 능욕하다가 그마저도 1943년 폐교)
숭실대학 같이 대학 인가를 받았던 학교도 전문학교로 격하하고 (숭실대는 총독부로 부터 대학 인가를 받았으나,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던 1925년 전문학교로 격하되며, 이후 신사참배에 반발하며 1938년 자진 폐교합니다)
고등학교 또한 중학교 보다 낮은 수준의 학교로 격하할 뿐만 아니라, 이미 설립된 학교들을 폐쇄하고, 설립도 제한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만행들로 인해 일제 강점기인 1911년부터 1945년 사이에 고등교육에서 수학과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ㅠㅠ 이 시기에 존재한 이공계 교육기관으로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1941), 경성고등공업학교(1916), 평양의 대동공업전문학교(1938), 경성광산전문학교(1939) 그리고 사립학교인 연희전문에(현재 연세대학교의 전신) 수물과가(1917) 전부였는데 (이마저도 조선인을 일본인보다 적게 뽑음)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경성제국대학경성제국대학은 광복후 경성대학으로 전환되었다가 미군정에 의해 폐교되었지만,
서울대의 설립 과정에서 시설들이 그대로 활용되고, 교/강사들도 그대로~
한편, 조선 유일의 국립대학이었던 성균관은 일제 강점기에도 이리저리 능욕당하더니 해방이후에도 안타깝기 그지 없는 상황이 이어지는데,
1946년 미군정 학무국의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 발표로(국대안 파동이 일어났지만, 미군정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반대운동은 급격히 약화됨.
이 국대안 파동으로 그나마 국내에 남아있던 우수한 이공계교수의 많은 수가 북한으로 넘어감)
국립대학이 되지 못하고, 유림세력의 지원을 바탕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유림세력의 대표인 김창숙을 총장으로 삼아 사립학교로 설립됩니다.
성균관대는 이후 유림의 지원으로 간간히 연명하다가 65년에 삼성이 재단으로 들어와서 숨이 트이는가 싶더니,
77년에 삼성이 수원으로 캠퍼스를 옮기려다 쫓겨나게 되어 다시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습니다.
96년에 다시 삼성이 돌아오긴 했지만... 아무튼 민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참 짠한 학교.
전문대 수준의 고등수학 일부가 전수되긴 하지만, 이때 당시의 전반적인 수학교육은 앞서 적었다 시피 저급한 실업 교육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기능습득이 우선시 되었습니다.
더욱이 사학 교원이 통제되고(일어에 능통한 자 중에서 사립학교 교원시험에 합격한 자와 일본에서 발급한 교원 면허자격증을 가진자로 제한하여 한국인의 사학교원 진출을 억제)
일본어 수업이 한국어 수업의 2배나 되며,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아시다시피) 교사가 제복에 칼을 차고 수업을 하니(...) 제대로 된 수학교육이 이뤄질리가 없죠.
이게 끝이 아닙니다. 보통학교 교육은 의무교육이 아니었고, 이 당시 소학교 학생 한 명의 1년 학비는 당시 성인 평균 월급의 2~3달치나 해당했다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1년 학비가 4~500만원씩 하는거죠)
당연히 대학 졸업은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던게(좀전에 국내 대학은 모두 말살당했다고 이야기 한거 기억하시죠?), 조선인은 일본인이 다니는 중학교에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일본으로 유학가서 졸업해야 했고, 그것도 여석이 있어야만 가능하였으며, 이 또한 거의 일본인 담임과 교장의 추천에 의해서만 가능했었기에 사실상 불가능이나 다름없었고(3ㆍ1운동 이후 아주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완전히 여건이 나빠짐), 그 당시 일본의 대학은 30여개의 고등학교 졸업자들만 학생으로 받아 들였기에 더더욱 불가능이나 다름없었죠.
이 외에도 쓸게 너무나도 많지만 다 쓰려면 몇날 며칠이 걸릴테니... 여기서 줄일게요. 그냥 짧게 말해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이유들로 광복 이후에도 한국은 수학을 포함한 모든 전문직종에서 심각한 인력난을 겪게 됩니다.
(광복 당시 한반도에서 수학으로 이학사 자격을 갖춘 인원은 열 명 남짓한 상황이며, 석사 학위자는 단 한 명 뿐이고, 박사 학위자는 아예 없었음)
당연히 제대로 된 수학 교육은 이뤄질 수 없는거죠.
말 그대로 그냥 아무것도 없었다. 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이임학 교수는 한국인 최초로 서구에 현대 수학 논문을 발표(!!)했으며, 자세한 건 제가 쓰지 않겠습니다.
직접 검색해보세요. 좀 해보라면 해봐요~ 대단한 양반임.
광복 이후 경성대학(경성제국대학이 광복 후 이름에서 제국을 뺌) 수학과가 이듬해 서울대학의 설립으로 서울대 문리과대학 수학과로 개편된 것을 시작으로
1948년 대구사범대학 수학과, 1949년 연희대학교 수학과 등등 연달아 수학과가 신설(또는 분리 독립)됩니다.
또한 1946년 10월 조선수물학회가 창립되고(정부수립이후 대한수물학회로 불림)
의무교육 실시, 학교 증설 (이 시기엔 일제 강점기때 썼던 수학책을 그대로 사용) 등을 바탕으로 수학계는 다시 태동하기 시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나
재정적인 어려움, 교사부족 등의 이유로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지진 못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1950년 6ㆍ25가 터지면서 납북되고, 월북하는 자들이 생기면서 수학계의 환경은 정말 말도 못하게 처참한 지경에 이릅니다.그 후...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이 기간에도 여러 국립/사립대학들은 수학과/수학교육과를 설치는 등 끊임없이 다시 일어서기 위한 노력을 하고,
1960년대 대학원 과정, 그리고 70년대 대학원과정의 정상화 등을 거치면서 겨우겨우 수학계는 안정을 찾게 됩니다.
여기서 부터는 다음 시간에...(이제 교육과정 이야기와 결론을 맺을꺼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