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원, 허공에도 각(角)이 있다
딸각딸각 껌을 씹다가
입안에 있던 소리를 꺼내본다
동그랗고 말랑말랑한 소리를
널따랗게 펴서 또르르 말아 당기니
허공이 와 부딪힌다
소리가 난다는 것은 허공이 깨진다는 것이지
스스로의 각에 걸려 넘어진다는 것이지
소리도 급할 땐 허공에 흠집을 내지
비명을 지르기도 하지
동글동글하기만 하다면 허공은
소리에 걸려도 넘어지지 않지
넘어져도 울지 않지
물이 있어 가끔은 젖은 소리를 내지
허공이 시시각각 접힐 때마다
내 몸 모서리에서도 물소리가 나지
정희성, 바닷가 벤치
마음이 만약 쓸쓸함을 구한다면
기차 타고 정동진에 가보라
젊어 한때 너도 시인이었지
출렁이는 바다와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
그 위를 떠가는 흰 구름
그리고 바닷가 모래 위 작은 벤치에는
너보다 먼저 온 외로움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김선태, 장대비
때로는 비가 세상을 후려치듯 내릴 때가 있다, 장대비다
이런 날은 지상의 만물들이 엄한 비의 회초리로 매를 맞는다
이런 날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까불대던 나무 이파리마저 미동도 없다
이런 날은 밖에 나가 종아리를 걷어 올리고 두 손을 높이 든 채 벌서고 싶다
하여, 저 줄기찬 질타와 참회가 그치면
세상의 죄란 죄들이 죄다 말갛게 씻겨 내려가겠다
다시 태어나겠다
허형만, 목숨
덕유산 국립공원 숲에서
수백 갈래로 찢겨진 갑옷을 입고
야생의 혓바닥으로
저 높은 하늘을 핥고 있는
굴참나무 한 그루
목숨이란 처절한 것이다
사람들은 굴참나무 아래를
무심하게 지나가고
어디서 오셨는지 다람쥐 한 마리
눈망울 반짝이며 꼬리는 꼿꼿이
검투사처럼 날렵하게 굴참나무를 오른다
이만한 풍경에도 감동하는 나이
처절한 목숨보다 더 처절한 건
갑옷 한 벌 갖추지 못한
나의 시정신이다
엄원태, 파문
운부암 아래 물엉덩이에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허공에 걸쳐진 소나무에 쌓인 봄눈이 녹아떨어지며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수면에
와인잔 연주나 오르골 소리처럼 동그란 파문들을 탄주한다
저토록 영롱한 두드림은 일찍이 내 청춘에도 있었다
지금 이토록 생생하게
그 심금(心琴)의 공명(共鳴)을 기억한다
내 이마는 미미하게 번져 오던 그 촉감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