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리, 그물
어떤 자는
던지고
어떤 이는
걸리고
어떤 놈은
빠져나가는
세상이라는
허방
맹문재, 하느님의 등을 떠밀다
열한 살 아이가 수술실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는 아득한 길 위에 서 있었다
손사래에서 포옹까지
불안에서 왕성한 웃음까지
아랑곳없음에서 다행까지
나 혼자 걷기에는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한마디가 운명을 되돌릴 수 있고
한 걸음이 운명을 붙잡을 수 있고
한 손이 운명의 화답을 받을 수 있겠지만
법칙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의 엄마가 수술실에 들어가는 것을
이모가 뒤따르는 것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달려가는 것을
삼촌이 파고드는 것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먼 길에 그림자가 되어달라고
실직자인 고모도
고모가 들고 다니던 도시락 가방도
가방에 붙은 가냘픈 벚꽃도
벚꽃 둘레에서 부산을 떨고 있는 벌들도
수술실에 밀어 넣었다
벌들을 품은 하늘도
하늘의 옷을 입고 있는 하느님도
돌다리 앞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부처님도 떠밀었다
홍윤숙, 창
창은 열려 있어야 한다
닫힌 창은 창이 아니다
환히 열린 창 앞에 서면
미지의 먼 나라들이
뭇별로 떠오르고
끝없이 아득한 길들이 나를 불렀다
나는 넓은 세상 길 위에서
수만 날을 꿈꾸며 떠돌았다
지친 여로의 날 저물고
아득한 마을 등불 켜지면
키 낮은 굴뚝에서
하얀 저녁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향집 그리워
거기 언제나 가슴 환히 열린 창
돌아갈 집이 있어
지상의 날들 비 오고 바람 차도
행복했다
창, 영원히 열려 있는 자유의 출구
창은 날마다 떠나는 포구가 되고
수만 리 길 돌아가는
원항선의 등대가 된다
내 생애의 밝고 따뜻하던
그리운 창
나는 너의 창이 되고 싶다
박주택, 귀소
저 불빛들도 이제는 빛이 아닌 것으로 돌아가네
저렇게 깊게 자신이 아닌 것으로 돌아갈 때
여름은 더욱 깊게 파여 한여름이 되고
가로수는 가로수대로 잎사귀를 흔드네
낮과 밤이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너무 많이 돌아 만나는 가을에는
내가 아닌 것과 나인 것이
네거리에서라도 만날 것이지만
빛이 꺼지듯 잎이 지듯
불현듯 가을이 지나고 나면
나에게로 돌아오는 나 아닌 것들에게
슬그머니 눈을 감아 보리라
최영미, 지루하지 않은 풍경
어디론가 갈 곳이 있어
달리는 바퀴들이 부러웠다
앞만 보고 질주하다
길모퉁이에서 부드럽게 꼬부라지는
빨갛고 노란 불빛들이 부러웠다
비에 젖은 8차선 대로는 귀가하는 차들이 끊이지 않고
신호등을 읽었다면
멈출 때를 알았다면
나도 당신들의 행렬에 합류했을지도
내게 들어왔던, 내가 버렸던 삶의 여러 패들은
멀리서 보니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하얀 가로등 밑의 물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져
보석 같은 빛을 탁탁 튀기며
지루하지 않은 풍경을 만들고
번쩍이는 한 뼘의 추상화에 빠져
8월의 대한민국이 견딜 만한데
이렇게 살아서, 불의 계절을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
비 오는 밤을 젖지 않고
감상하는 방을 주신 신에 감사하며
독한 연기를 뿜었던 입 안을 헹구고
내 밑에서 달리는 불빛들을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