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관, 색맹
개가 색맹인 것은
간밤에 달을 물어뜯은 까닭이다
잠들지 못하고
처마 밑에서 오도독 떨며
오래도록 별을 바라본 까닭이다
눈 내리면 저리 좋아 뛰는 것은
별이 제게로 오는 줄 아는 까닭이다
비 내리면 목소리 저리 청승스런 것은
제 사랑을 그리워하는 까닭이다
산수유 피어오르는 날
봄의 목을 조이며 날아오르는 나비 한 쌍
황사로 물드는 하늘
눈 내리면 출근길 걱정
비 내리면 공연히 마음 심란한 것은
내게 별도 달도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색맹
앞만 보고 걸어가야 하는 까닭이다
권현형, 미열, 흰 눈
흑백의 화면이 켜져 있다
어떤 상처나 찢어짐도 없는 밤
아가는 밤새 미열로 뒤척이고
당나귀처럼 뒷발질로 발버둥질로
배냇열을 스스로 다스리고
할머니가 텔레비전과 단둘이 살 수 있도록
냉장고 속 오래된 음식을 버리고 얼리고 말리고
어머니는 밤새, 몸이 식어버린 살림살이를 쓰다듬는다
시간을 신문지에 둘둘 감아 미라 상태로 냉동 보관한다
어머이 어머이, 오냐 오냐
두 사람의 나직한 질문과 답이
밤사이 흰 눈처럼 할머니의 좁은 아파트에 쌓인다
아이의 이마에 돋는 홍매화 같은 미열도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어머니의 오랜 살림살이도
밤새도록 추는 흰 눈발의 춤사위 같기만 하다
모든 상처의 찢어짐이
손바느질로 꿰매어지는 밤
김정원, 가출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집을 나갔다
밤늦도록 대문 밖에서 그를 기다리다
문득
하늘로 출가한 키 작은 아버지가
눈앞에 무척 크게 어른거려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 슴벅하게 젖는다
그 옛날 철없는 내가 집을 나갔을 때
착잡한 아버지도
차가운 달빛에 뜨거운 눈물 식혔을 것이다
이제야 제대로 벌 받는 이 늙은 아이처럼
권혁수, 참을 수 없는 가려움
웃을 수도 울 수도 가려움은 한 때 끈끈한 아버지의 등이었다
유산 대신 수수깡 흙벽 모서리에 붉은 핏자국
남기고 떠난 아버지의 10년 묵은 문신,
기약 없이 내 등에 퍼렇게 새겨지고 있다
모서리 없는 아파트의 은행 대출 자국
긁어야 할 등 찾는 나의 귀가는
그래서 늘 늦어진다
해의 퇴근길처럼
검은 구름 밟고 지나 가시나무 숲에 등을 벅벅 문지르며 넘는
서산 능선 같은 12월말
핏빛 노을이 번지다 짙게
가슴에 달라붙은 가려움
긁어줄 소주
술잔 속으로
신해욱, 보고 싶은 친구에게
열두 살에 죽은 친구의 글씨체로 편지를 쓴다
안녕. 친구. 나는 아직도
사람의 모습으로 밥을 먹고
사람의 머리로 생각을 한다
하지만 오늘은 너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구나
냉동실에 삼 년쯤 얼어붙어 있던 웃음으로
웃는 얼굴을 잘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구나
너만 좋다면
내 목소리로
녹음을 해도 된단다
내 손이 어색하게 움직여도
너라면 충분히
너의 이야기를 쓸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답장을 써주기를 바란다
안녕, 친구
우르르 넘어지는 볼링핀처럼
난 네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