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낯선 방에서
초저녁에
빗소리
들리기 시작한다
깊은 밤에까지 빗소리
평생 옥수수 농사만 짓는 사람의 발길처럼
오르락내리락 이어진다
새벽에, 빗소리
없다 빗소리 없고
파래진 창 모퉁이에
말간 손톱달이
갸글갸글한 숨결에 씻기고 있다
온몸이 그리운 숨결이다
온몸으로 그리운 숨결이다
고정희, 사십대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이태관, 파리 날다
조롱박 위를 구르던 바람이 어느새
창문을 넘었나 보다
며칠 째 펼쳐놓은 책갈피 위를 뒹굴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듯 살며시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파리 날다
넘어지려는 한 세계 위에 앉아
가만히 그네를 탄다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와
마음이 가 닿는 그 간극
파리 날다
휘둘린 파리채에 제 몸을 낮춘다
한 세계의 문이 닫힌다
정병근, 나비와 길
나비가 앉았다 떠난
문지방이 반들반들하다
옛 선사가 파놓은 심지(心池)처럼
한 치 앞에 도달하기 위해
나비는 첩첩 먼 길을 돌아가는 것이다
사방의 바깥을 헤맨 자만
길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것
저 나비의 위태로운 행로는
안으로 이르는 바깥의 최단거리이다
만 리 길을 구불구불 돌아온
꽃향기가 코앞에 무성하다
아주 먼 길을 떠나거나
지금 여기에 당도하지 않는다면
오, 무용(無用)의 한낮과 사방
홍해리, 막차가 떠난다
별이 우는 밤이면 막차가 떠난다
산도 울어 계곡따라 메아리로 흐르고
달빛 속으로 스러져가는
들판의 벗은 바람소리와 함께
마음을 싣고 막차는 떠난다
기적을 울리지 않고 가는 길
눈물 같은 별이 하나씩 길 위에 내리고
새벽은 올 것인가
쓰리게 흐르는 저문 강물이여
밤이 무거워 비껴서지 못하는
나목들 가지마다 걸려 있는
안개, 텅 빈 들녘, 해질 무렵, 넋, 열정
상처와 환희, 떨어진 꽃잎, 그리고
모든 존재란 의미이고 이름일 따름
속절없이 피었다 지는 것이 꽃뿐만이랴
하늘이 시작되는 곳이 어디인지
상처 받은 별떨기가 찔레꽃으로 피어나는
여름이 봄보다 먼저 왔다 가고 나면
가을은 슬프고 겨울은 눈부시지 않더냐
오늘은 첫눈이 내리고
나는 밤으로 가는 막차를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