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기, 달팽이
정말 힘들게 사시네 그려
항상 짐을 지고 여행 다니는 것을
사람한테 배운 것이던가
짐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자네도 알기는 알 테지
짐을 버리고
자네조차 버리고
달을 팽이 삼아 놀아보게나
최영미, 나의 여행
거리에서 여행가방만 봐도
떠나고 싶어
세계지도를 펼치면
거기쯤에 있을 것 같아
내가 떠나온 고향이
흥분의 지퍼를 밀고 당기고
가방 속에 아침과 저녁이 들어갔다, 나갔다
자면서도 계산기를 두드린다
그날이 다가오면
이미 진이 빠져
터미널에 내려
무서운 자유의 광풍이 불면
전 생애를 끌고 어그적 어그적
하룻밤 잘 곳을 찾아
다음날 아침에는 지도를 보며
새로운 도시를 정복할
구두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길을 잃어본 자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문정영, 번진다는 것
번진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이 녹슨 철길 너머로 봄풀 번지듯
건너오는 것이 보이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약이 없다는 것
산다는 것은 그렇게 서로 번져서 푸르거나 붉게 물든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하루가 내게로 시간차 없이 건너온다는 것
혀의 아래쪽이 때때로 마른다는 것
봄풀 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젖어 있다는 것
마른다는 것이나 젖은 것도
다 번지는 것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번진다는 것
때로 아픈 것이다
최정례, 실려 가는 나무
트럭에 실려 가는 나무는 내가 아니지
여자라고 할 수도 없지
산발한 머리채로 길바닥을 쓸며 끌려가는데
누구냐고 물을 수도 없고
오늘의 뉴스는 어제의 뉴스와 비슷하고
24시 해장국 간판은 24시간 피곤하네
어제의 나뭇가지를 누벼 가던 달은
오늘 비틀거리지도 않고 제 길을 가고
뿌리 뽑힌 구덩이를 내려다보고도
같은 표정이네
걱정할 것은 없겠지
나만 죽고 당신은 오래 산다 해도
금방 내일이 될 테니
아이들도 혈육들도
어리둥절한 달도 무표정한 달도
모두 내일을 지나 모레를 지나
제 궤도를 가겠지
다른 행성으로 이사라도 가는 것처럼
트럭에 누워 실려 가는 나무
가로수들 일제히 도열해서
경례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여기 잘못 왔다는 것인가
내내 서 있기만 하다 누워 가는데
조용히 못 본 척해야 하나
오춘옥, 뒷모습이 말했다
몇 번의 이별을 더 견뎌내다가
꽃은 진다
별자리를 뛰쳐나온 별들의 총총함으로
폐사지 돌멩이의 하염없는 깊이로
흉터마다 검은 씨 들기까지
허기가 이끄는 대로 이 골 저 골 헤매느라
초저녁 각도로 기울어진 어깨
그만 짐을 풀고 싶어 구겨진 엉덩이
너의 질문에 대한 오랜 나의 답이다
꽃 진 자리, 돌아와야 할 것들 아직 멀리 있어
거기까지 말없이 가자는데
눈과 입 먼저 보낸 뒷모습이
두서없이 무어라무어라 말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