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끊어진 철길
끊어진 철길이 동네 앞을 지나고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민통선 안 양지리에 사는 농사꾼 이철웅씨는
틈틈이 남방한계선 근처까지 가서
나무에서 자연꿀 따는 것이 사는 재미다
사이다병이나 맥주병에 넣어두었다가
네댓 병 모이면 서울로 가지고 올라간다
그는 친지들에게 꿀을 나누어 주며 말한다
"이게 남쪽벌 북쪽벌 함께 만든 꿀일세
벌한테서 배우세 벌한테서 본뜨세"
세밑 사흘 늦어 배달되는 신문을 보면서
농사꾼 이철웅씨는 남바한계선 근처 자연꿀따기는
올해부터는 그만두어야겠다 생각한다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인근
버렸던 땅값 오르리라며 자식들 신바람 났지만
통일도 돈 가지고 하는 놀음인 것이 그는 슬프다
그에게서는 금강산 가는 철길뿐 아니라
서울 가는 버스길도 이제 끊겼다
김지하, 눈발을 타고
눈물 그렁그렁한 얼굴로
머리칼 휘날리며
단 한 번 남쪽 하늘 바라보던
당신 얼굴을
나는 어제 보았다
내리는 눈발 속에서
떨어지는 물의 속도를 거꾸로 타고
잉어는 삼단 폭포를 뛰어오른다
내리는 눈발을 타고
눈물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잠시라도 잠깐이라도
북녘 하늘을 향해
당신 눈빛을 보고 싶다
김용택, 우리 땅의 사랑노래
내가 돌아서드래도
그대 부산히 달려옴같이
그대 돌아서드래도
내 달려가야 할
갈라설래야 갈라설 수 없는
우리는 갈라져서는
디딜 한 치의 땅도
누워 바라보며
온전하게 울
반 평의 하늘도 없는
굳게 디딘 발밑
우리 땅의 온몸 피 흘리는 사랑같이
우린 찢어질래야 찢어질 수 없는
한 몸뚱아리
우린 애초에
헤어진 땅이 아닙니다
곽재구, 임진강 살구꽃
섬진강물에 피는 복사꽃처럼
임진강변에 지는 살구꽃처럼
우리 그리운 마음 꽃바람 흩날릴 수 있다면
사랑은 더욱 그리워 흙바람도 이는 것을
봄산 넘어오는 햇살 말고
마음으로 넘어오는 그리움 말고
우리 함께 손잡고
꽃잎 뜨는 강물 지켜볼 수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아
아침 강물에 복사꽃 피었더니
가슴의 슬픈 첩첩사연
저물녘 살구꽃 몇 잎에 띄었구나
양성우, 지금은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총창뿐인 마을에 과녁이 되어서
소리 없이 어둠 속에 쓰러지면서
네가 흘린 핏방울이 살아 남아서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 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골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진흙의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네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 끝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끈끈한 눈물로
잠시 머물다가 갈지라도
불보다 뜨거운 깃발로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이 땅을 깨우고
남과 북이 온몸으로 소리칠 수 있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엄동설한에 재갈 물려서
식구대로 서럽게 재갈 물려서
여기저기 쫓기며 굶주리다가
네가 죽은 그 자리에 과녁이 되어
우두커니 늘어서서 눈감을지라도
오직 한 마디 민주주의, 그리고
증오가 아니라 포옹으로
네가 일어서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이 저주받은 삼천리에 피었다 지는 모오든 꽃들아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